[O2/커버스토리]사랑의 시… 가족사진… 홀인원 기념패… 영원히 살아있는 빛나는 순간들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5월 26일 03시 00분


■ 추억을 모아 놓은 안치단

꽃 뒤에 놓인 소주 한 병과 담배 한 갑이 인상적이다. 파주=김창덕 기자 drake007@donga.com
꽃 뒤에 놓인 소주 한 병과 담배 한 갑이 인상적이다. 파주=김창덕 기자 drake007@donga.com
얇은 책 한 권이 안치단 앞에 매달려 흔들렸다. ‘꽃무릇’이란 제목의 시집. 제목 밑에는 ‘먼저 떠나간 아내가 남편에게 남긴 유작시 135편’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혹시나 싶어 저자의 이름을 안치단의 이름표와 맞춰봤다. 똑같다. 손때가 묻은 하얀 실로 정성스럽게 매어놓은 시집이 ‘쿵’ 하고 가슴 위로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았다.

22일 오후. 두꺼운 외투 하나 버텨내기 힘들어 보이는, 엄지손가락만 한 벽걸이가 이날도 무거운 삶의 무게를 홀로 견뎌내고 있었다.

○ 치즈와 과자


시집의 책장을 몇 장 넘겼다. 남편이 쓴 서문에는 시집에 얽힌 사연이 적혀 있었다. 유방암으로 긴 투병 생활을 하던 아내는 가슴속에 맺힌 한을 시로 풀어냈다. 그녀는 남편에게 “시 100편을 지어주겠다”고 했다. 그 말에 남편도 약속을 했다. “혹여 먼저 가더라도 시집 한 권은 꼭 만들어줄게.” 그렇게 세상에 태어난 시집을 남편은 아내 곁에 걸어두었다.

봉안당에는 끝나는 않는 ‘말’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벽면을 가득 채운 안치단에는 가족들이 남겨 놓은 다양한 물건이 저마다의 사연을 간직한 채 함께 잠들어 있다. 투명한 유리 안치단 안에 봉안함과 함께 넣어둔 것들도 있고, 안치단에 나름의 방법을 찾아 붙이거나 매달아 놓은 것들도 있다.

빛바랜 고인의 사진이나 가족사진은 기본이다. 대한통운 회덕 영업소 앞에서 찍은 가족사진 한 장은 단란하고 행복해 보였다. ‘우리 아이들은 저런 가족사진을 가지게 될까’라는 생각이 문득 머리를 스쳤다. 안경들도 유난히 자주 눈에 띄었다.

경기 하남시의 한 봉안당에서는 치즈 한 장과 마주쳤다. 이 봉안당의 규정상 안치단 유리에는 아무것도 붙일 수 없게 되어 있지만, 얇은 치즈는 투명테이프로 유리 위에 정성스럽게 붙어 있었다. 지금은 유골함 안에서 쉬고 있는 아이가 생전에 치즈를 무척이나 좋아했나보다. 유골함 옆에는 옅은 노란색 모자를 쓴, 첫돌도 되어 보이지 않는 아기가 볼에 연지를 곱게 찍고 환하게 웃는다. 그 모습이 보는 사람의 마음을 더 애틋하게 했다.

경기 파주시의 또 다른 봉안당에선 ‘칙촉’이란 이름의 과자를 만났다. 과자 상자 위에는 모형 비행기 2대가, 앞에는 군번줄이 놓여 있었다. ‘병 ×××기 동기 ○○○ 등이 다녀감’이라고 쓴 쪽지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친구들과 함께 손으로 ‘브이’자를 그리는 사진 속 앳된 청년은 하늘나라에서도 친구를 사귀었을까.

어르신들을 위한 ‘즐거움’도 빠지지 않았다. 고인의 ‘기호’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소주 한 병과 그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담배 한 갑. 또 다른 안치단 안에 놓인 미니어처 양주병, 화투 등도 제각기 고인의 쓸쓸함을 달래주고 있었다.

○ 노력의 결실들


함께 누리지 못한 영광의 순간들을 조금이나마 나누고 싶은 마음도 유리창 안에 쌓인다. 6일 간격으로 받아든 서울대와 포스텍(포항공대)의 합격증. 고인의 아들인 청년은 ‘12학번’으로 둘 중 어느 한 대학을 갔으리라. 과학고등학교를 다녔던 청년은 마지막까지 고인에게 자랑스러운 아들이었다. 주변에 잠든 다른 고인들의 ‘부러운’ 눈초리가 쏟아지는 듯했다.

9개 중 2개를 제외한 과목에서 ‘A+’를 받은 성적표도 유골함 앞을 자랑스럽게 지키고 있었다.

2과목 중 한 과목은 따로 학점이 부여되지 않는 과목이고, 또 다른 과목의 학점은 B+였다. 한 학기를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살아낸 자식의 모습은 하늘의 어머니에게 뿌듯함과 기분 좋은 웃음을 선사했을 것이다.

이 밖에 주인을 잃은 휴대전화, 운전면허증, 기술자격증 등도 눈에 띄었다. 1996년 6월 16일 4번홀 167야드에서 달성한 홀인원 기념패도 있었다.

이름 모를 산새와 뻐꾸기 소리가 창밖에서 들려오는 순간, 생일파티를 하기 위해 둘러앉은 가족사진과 또다시 맞닥뜨렸다. 생에서 가장 행복한 때인지도 모를 지금을 우리는 어떻게 보내고 있는 것일까. 잠시 생각이 이어지는 듯하더니, 또 다른 안치단에 놓여 있던 ‘일본어 첫걸음’이라는 책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남겨진 이들은 왜 그곳에 그 책을 가져다 놓았을까. 궁금함은 해답을 찾지 못하고 창을 통해 비치는 투명한 햇살 사이로 사라졌다.

박희창 기자 ramblas@donga.com  
김창덕 기자 drake007@donga.com  
#납골당#안치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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