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플러스/드라마캐릭터열전]이도의 “지X하고 자빠졌네”에 정이 가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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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2월 7일 15시 3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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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방을 무장 해제 시킬 것 같은 부드러운 미소를 얼굴 가득 머금지만, 이내 자신의 마음과 다른 현실 앞에서 신경질을 부리며 주변 사람들을 곤혹스럽게 만드는 사람은 상대방을 긴장하게 만든다.

치열한 탐구 정신으로 한 치의 어긋남도 없도록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을 꼼꼼하게 챙기면서 내린 결론을 실천하기 위해 그 어떤 머뭇거림도 허용하지 않는 사람은 상대방의 경외심을 유발하기도 한다.

그렇게 부드러운 미소와 신경질적인 몸짓 그리고 치열한 탐구와 거침없는 실천이 어우러진 사람을 만나 본 적이 있는가?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자신이 타고난 고귀한 혈통 덕분에 받는 혜택을 보다 많은 사람들과 함께 나누기 위해 고민했던, 동시에 자신의 뜻을 가로 막는 거대한 장벽 앞에서 결코 굴하지 않고 오히려 전투의지를 다졌던 그는 어느 한 가지 성향으로 정리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그래서 매력적이다. 얼굴이 뛰어나게 잘 생기거나 키가 훤칠하게 큰 것도 아니지만, 특정 부류만이 아닌 모두가 행복한 세상을 만들겠다는 마음과 행동이 그를 세상 그 누구보다 매력적인 존재로 각인시켰다.

자애로움과 근엄함, 학구열과 통찰력, 인간미와 영도력으로 소통의 정치를 실천하면서 매력적인 지도자의 원형을 보여준 그는 바로 역사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의 이도(한석규 분)이다.

한글 창제 과정과 반포 직전의 긴박한 상황을 미스터리 스릴러 기법으로 풀어낸 '뿌리 깊은 나무'에서 이도는 인간적 면모가 돋보이는 매력적인 군주로 등장한다. 그는 왕권과 신권의 대립 구도 속에서 피바람을 불러 일으켰던 아버지 세대의 폭력적 통치 방식을 거부한다.

대신 백성의 고단한 삶을 어루만지는 정치 철학을 견지함으로써 역사상 최고의 성군(聖君)으로 추앙받는 이도 세종이 '지랄'이나 '우라질' 같은 비속한 표현을 거침없이 사용하면서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낸 것이다.

저자거리의 무지렁이 백성들이나 사용하는 비속어를 입에 달고 다니면서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그의 행동 때문에 조정 대신들은 불만이 많다. 말과 글의 소통을 강조하는 그가 조정 대신들의 불만을 모를 리 없을 터이나, 그는 결코 자신의 언어를 바꾸지 않는다.

오히려 만백성의 아버지인 일국의 군왕이 체통을 지키지 않아 불만스러워 하는 조정 대신들에게 "지랄하고 자빠졌네!"라고 일갈하면서 백성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체통은 허례허식일 뿐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도대체 왜 그런 거칠고 속된 표현을 사용한 것일까? 역사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는 그 이유를 말과 글이 달라 고통을 겪는 백성의 마음을 표현할 글자를 만들기 위한 탐구의 과정으로 극화한다.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라면 혈육조차 가차 없이 처단하던 아버지 태종으로부터 장인을 지키려고 은밀하게 작성한 자신의 편지 한 통 때문에 무고한 백성이 억울하게 죽음을 당하고, 마을에 역병이 돌고 있으니 피신하라는 내용의 방(榜)을 읽지 못해 백성들이 집단으로 죽어가는 것을 목격하면서 절망에 빠진 그는 모든 백성이 쉽게 쓰고 읽을 수 있는 문자를 만들기로 결심한다.

그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저자거리의 백성들이 사용하는 말로 자신의 감정을 거침없이 표현했던 것은 백성의 마음이 담긴 소리를 표현할 수 있는 글자를 만들기 위한 깊은 뜻이 담긴 행동이었다.

각각의 음성에 대응하여 그 발음을 나타내는 글자를 만들기 위해 시신의 성대 해부를 의뢰하여 발성기관을 분석할 정도로 뜨거운 학구열 역시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한 것이다.

역병으로 죽어가는 백성들을 보고 괴로워하는 자신을 위로하는 궁녀 소이(신세경 분)에게 "꽃이 지고, 홍수가 나고, 벼락이 떨어져도 내 책임이다. 그게 임금이다. 모든 책임을 지고, 그 어떤 변명도 필요 없는 자리, 그게 바로 조선의 임금이란 자리다!"라고 절규하는 것도 임금으로서의 책임감이라기보다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앞서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삼봉 정도전'의 유지를 받들어 신권 강화를 주장하는 반대 세력인 '밀본(密本)'의 수장 정기준(윤제문 분)이 한글 반포를 저지하기 위해 한글 창제 과정에 함께 했던 아들 광평대군(서준영 분)을 납치했다고 알려진 상황에서도 아들 대신 한글 반포를 선택할 정도로 백성을 위하는 그의 마음은 절대적이다.

모든 백성이 쉽게 읽고 쓸 수 있는 한글 반포를 위해 사랑하는 아들의 목숨을 포기할 정도로 임금으로서의 책임감을 막중하게 생각하는 그에게 넘쳐나는 인간적인 면모는 그를 더욱 매력적인 인물로 만든다.

그는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기 위해 주변 사람들에게 수시로 농담을 건네면서 자칫 경직될 수 있는 분위기를 부드럽게 바꿀 줄 아는 다정다감한 성품의 소유자이다.

쉬운 글자를 만들기 위해 연구하는 과정에서의 일화는 그의 다정다감한 품성을 잘 보여준다. 궁녀 소이의 뛰어난 연구 능력에 확인하고 근엄한 표정으로 집현전 직제학 '정인지(혁권 분)'를 질책하던 그는 소이보다 일을 못하니 녹봉 1/100만 받아야 하는 것 아니냐면서 정인지를 당황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내 장난스럽게 녹봉을 다 받고 싶으면 열심히 일해야겠다고 농담하면서 분위기를 주도하는 상황은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잘 보여준다.


임금으로서의 권위를 누리기보다 백성의 아픔을 함께 나누면서 소통을 지향하는 인간적인 지도자로서의 면모는 겸사복 강채윤(장혁 분)과의 관계에서도 잘 나타난다.

이도는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강채윤이 호시탐탐 자신을 노린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집현전 학사들의 의문의 연쇄 살인 사건은 물론 '밀본'의 정체를 파악하는 수사를 맡긴다.

강채윤에게 무엇이 진짜 백성을 위하는 것인지 알려주기 위해 왕권을 상징하는 자신과 신권을 대행하는 정기준의 대립 구도에 그를 끌어들인 것이다. 밀본에 대한 수사 과정에서 한글의 효용성을 검토하는 것은 물론, 강채윤의 상처를 치유하겠다는 이도의 지략이 빛나는 지점이다.

이도가 호위무관 무휼(조진웅 분)의 만류를 물리치고 강채윤을 옆에 둔 것도 그래서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강채윤의 위협감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다.

이도는 남사철(이승형 분)의 자작극으로 사대부 모두가 이득을 본 일에 대한 수사를 강채윤에게 지시한 뒤 무휼과 함께 걸어가다가 "아까 5보 이상 떨어져 있더구나. 그 자가 내게 가진 생각을 모르느냐? 앞으로 각별히 신경을 쓰거라. 은근히 신경을 안 써. 3보 이내에 있어라!"라고 타박하는 모습은 인간 이도가 느끼는 공포의 실체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끊임없이 긴장해야 하는 임금 이도가 호위무사 무휼을 타박하는 장면에서 발생하는 웃음이 인간 이도에 대한 연민으로 전이되면서 그에 대한 연민의 감정을 자극하는 것이다.

이도는 상대방의 의중을 파악하고 그것에 맞춰 심리적 대응 기제를 만들어가는 능력이 뛰어나다. 그는 아들 광평대군의 목숨을 두고 자신을 협박하는 밀본 세력은 '감정적인 냉소'로, 중화 질서에 어긋나는 새로운 글자 창제를 반대하는 조정 대신은 '이성적인 논리'로 제압할 정도로 복합적인 인물이다.

이러한 그의 심리적 대응 기제는 아버지 태종과의 대립, 똘복이 아버지의 죽음, 정도전의 재상중심주의를 강조하는 정기윤의 비난 등에서 비롯한 정신적 외상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터득한 나름대로의 생존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이도 세종'에게 존경과 연민의 감정이 교차하는 이유도 그래서이다.

어쩌면 감성과 이성을 자유롭게 조절하면서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임금 이도'의 인간적 매력은 이도 역을 맡은 배우들이 아니었다면 제대로 표현되지 못했을 것이다.

한 없이 여린 얼굴 표정 속에 극도의 공포감을 숨긴 채 아버지와 맞서야 했던 젊은 시절의 이도를 연기한 배우 송중기, 새로운 글자를 연구하는 다정다감하면서도 치열한 열정과 중화 질서를 강조하는 조정 대신들과 맞서는 단호한 정치력의 임금 이도를 부드럽고 강인하게 연기한 배우 한석규가 있었기에 역사 위인전의 주인공 '세종대왕'이 역사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에서 인간적 매력 가득한 '인간 이도'로 새롭게 태어날 수 있었다.

임금으로서의 책임감, 학자로서의 열정은 공존하기 쉽지 않은 감정들이다. 하지만 그 감정들이 조화를 이루는 순간, 지혜롭고 현명한 지도자가 탄생한다.

백성을 생각하는 자애로움과 한 나라의 조정을 책임져야 하는 근엄함을 부드러우면서도 신경질적으로 표출하는 '임금 이도', 새로운 글자를 만들기 위해 전력투구하는 치열한 탐구 정신과 열정적인 토론을 마다하지 않는 '학자 이도'가 바로 그런 지도자였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격동이 예고된 2012년을 앞둔 지금이야말로 자애로움과 근엄함, 학구열과 통찰력, 인간미와 영도력으로 소통의 정치를 실천했던 '이도 세종'의 정치력이 그립다. 그래서인지 이도의 "지랄하고 자빠졌네!" 한 마디에 정감이 가고 통쾌하게 느껴진다.

윤석진 충남대 국문과 교수·드라마평론가 drama@c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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