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두 청춘의 무작정 유럽축구 기행]<3> 독일서 손흥민 득점 순간을 볼 줄이야!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10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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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민 선제골에 울컥, 유니폼 ‘하사’ 에 감격

우승호(왼쪽) 조영래 씨(왼쪽에서 두 번째)가 독일 프라이부르크 바데노바 경기장에서
함부르크 팬 야코프 씨(조영래 씨 오른쪽) 등과 응원을 펼치고 있다.
우승호(왼쪽) 조영래 씨(왼쪽에서 두 번째)가 독일 프라이부르크 바데노바 경기장에서 함부르크 팬 야코프 씨(조영래 씨 오른쪽) 등과 응원을 펼치고 있다.
경기를 마친 손흥민이 관중석의 우리 쪽으로 걸어오고 있다. ‘잠깐 이야기하며 사인을 받을 수 있었으면…’, ‘아니, 우리의 응원에 약간의 반응만이라도 해줬으면…’ 하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철망 너머 멈춰 선 그의 눈빛을 읽을 수 있었다. ‘응원해줘서 고마워요.’ 우리도 쿵쿵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표정으로 답했다. ‘네가 자랑스러워 죽겠다.’ 그가 유니폼 상의를 훌러덩 벗더니 철망 사이로 건넸다. 얼이 빠진 우리는 말 한마디 못하고 그저 받아들 뿐이었다. 그가 뒤돌아 걸어가자 “와” 하는 환성이 터져 나왔다. 주위 함부르크 팬들의 부러워하는 시선이 우리에게 꽂혔다.

○ 흥민아, 기다려


8월 말 독일 프로축구 분데스리가에서 뛰는 손흥민의 안타까운 부상 소식이 들려왔다. 10월이 되어야 복귀가 가능하다는 진단이었다. 회복 후 적응 기간까지 생각하면 그가 16일 SC 프라이부르크와의 원정경기에 출전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모든 것을 운에 맡기고 이탈리아에서 독일로 차를 몰았다.

독일어 지명엔 유난히 ‘부르크(burg)’로 끝나는 것이 많다. 성, 성곽을 뜻하는 이 말 때문에 프라이부르크라는 말도 낯설지 않았다. 하지만 지도에서 프라이부르크를 찾으려면 독일, 스위스, 프랑스 3국의 국경이 맞닿은 곳을 자세히 살펴봐야 했다. 어디서 들어봤다 했더니 스코틀랜드 리그 셀틱 팀의 차두리 선수가 한때 뛰었던 팀이다.

뮌헨에서 슈투트가르트를 거쳐 흑림(黑林)을 끼고 남부로 내려가면 프라이부르크다. 흑림은 동화 속 헨젤과 그레텔이 길을 잃고 헤매다 마녀를 만난 바로 그 숲이란다. 손흥민의 소속팀 함부르크가 맞서 싸울 SC 프라이부르크의 홈구장(바데노바 경기장)은 도시를 가로지르는 드라이잠 강변을 따라 동쪽으로 걷다 보면 나온다. 주택가에 위치한 아담한 곳으로 2만4000명을 수용할 수 있다.

우리는 원정팀인 함부르크 팬들과 함께 응원할 수 있는 남쪽 골대 뒷자리를 샀다. 특이하게도 이곳은 입석이다. 가격은 좌석 자리의 3분의 1 정도인 11유로(약 1만7000원)다. 지정석이 없기 때문에 자리싸움이 치열하다. 키가 큰 독일인들 사이에 서면 ‘흑림’이 따로 없다. 재미있는 건 함부르크 팬들 중 정말 열혈 팬들은 철망으로 양쪽이 가로막힌 부채꼴 모양의 관중석에 진을 쳤다는 것. 이 관중석 입구에는 게스테(G¨aste·손님)라고 쓰인 푯말이 붙어 있다. 원정팀 팬들이 프라이부르크 팬들과 행여나 몸싸움을 벌일까 우려해 아예 격리를 한 것 같았다.

어렵사리 자리를 잡고 캠핑장에서 미리 만든 응원도구를 꺼냈다. 텐트 바닥깔개로 쓰는 연두색 형광매트에 검은색 절연테이프로 ‘손흥민’ 세 글자를 써 붙인 것이다. 궁여지책으로 만들었지만 눈에 확 띄었다. 매트를 펼치자마자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쳐다본다. “뭐라고 쓴 거냐”고 묻는 사람도 여럿이다. 손흥민의 한국어 이름이라고 가르쳐주니 어떻게 발음하느냐고 또 묻는다. 그동안 이들은 손흥민을 ‘손’이나 ‘민손’으로 불렀던 터라 ‘흥’ 소리를 내기가 여간 어렵지 않은가 보다. 제대로 발음하는 독일인이 전혀 없었다.

○ ‘일생의 행운’이 우리에게

손흥민의 유니폼을 들고 독일 팬들과 함께 신이 났다(위쪽 사진). 경기 전 맥주로 흥을 돋
우는 독일 관중. 조영래 우승호 씨 제공
손흥민의 유니폼을 들고 독일 팬들과 함께 신이 났다(위쪽 사진). 경기 전 맥주로 흥을 돋 우는 독일 관중. 조영래 우승호 씨 제공
경기 시간이 다가오자 선수들이 피치(운동장)로 나와 몸을 풀기 시작했다. 조끼를 입은 손흥민도 보였다. ‘혹시 선발로 못 뛰는 건 아닐까?’ 응원문구를 풀이해 주며 말을 트게 된 옆자리의 야코프가 “주전으로 뛸 선수들이 조끼를 입는다”고 설명해줬다. 함부르크의 열렬한 팬인 그는 손흥민이 분데스리가에서 손꼽히는 신성(新星)이라며 침을 튀겼다. 괜히 기분이 좋아진 우리는 목이 터져라 ‘손흥민 파이팅!’을 외쳤다. 경기장이 크지 않아 들릴 것도 같은데 그는 쳐다보지 않았다. ‘손흥민 킹왕짱!’이라고도 외쳤지만 역시 소용이 없다.

야코프의 말대로 손흥민은 최전방에 포진했다. 몸이 가벼워 보여 은근히 골을 기대해 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기대에 대한 응답은 금세 돌아왔다. 전반 12분 만에 그가 헤딩슛으로 골을 성공시킨 것이다. 코너킥 기회에서 동료 선수가 헤딩슛한 공을 상대방 골키퍼가 쳐내자 골문 앞에서 머리로 밀어 넣었다.

모든 함부르크 팬들이 환호했다. 게스테 관중석에 있던 팬들은 철망에 매달려 소리를 지르며 마시던 맥주를 공중에 뿌리기까지 했다. 이 극렬 팬들은 버스를 대절해서 모든 방문경기를 쫓아다닌다고 한다. 함부르크에서 프라이부르크까지는 자동차로 7시간이 넘게 걸리는 먼 길이다. 이탈리아 올림피코 경기장에서 보았던 연기폭죽도 터졌다. 흥미롭게도 폭죽을 반길 것 같던 극렬 팬들은 연기폭죽이 터지자 바로 장본인을 색출해 야단을 쳤다.  
▼ 흥민이 유니폼 주고 간 뒤 독일팬들 “함께 사진찍자” ▼

손흥민의 활약으로 함부르크는 2-1 승리를 거뒀다. 경기 후 함부르크 선수들이 팬들에게 인사하러 관중석으로 다가왔다. 후반에 교체돼 나간 손흥민도 동료들과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 우리는 철망에 붙어서 더 크게 “손흥민”을 외쳐댔다. 동료 선수 하나가 우리를 가리키며 그에게 귀띔해줬다. 살짝 쳐다보는가 싶더니 이번에도 이내 고개를 돌렸다. 팬들에게 인사를 마친 함부르크 선수들은 하나둘씩 라커룸으로 향했다. 그때 마법같이 ‘유니폼 하사(下賜)’의 순간이 벌어진 것이었다.

손흥민이 발길을 돌리자 사람들이 주위로 몰려들어 너도나도 한 번씩 유니폼을 펼쳐봤다. 같이 사진을 찍자는 사람도 한둘이 아니었다. 우리가 누군지, 어디서 왔는지, 손흥민과는 어떤 관계인지 궁금해했다. 우리를 중국인으로 오해한 한 팬이 “니하오”라며 인사하자 주위 함부르크 팬들이 “이들은 한국인”이라고 정정해줬다.

한 독일인이 다가와 말했다. “너희가 멀리 독일까지 와서 본 경기에, 너희 나라 선수가 골을 넣었고, 그가 너희에게 유니폼까지 준 일은 인생에서 경험하기 힘든 행운이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유니폼이 한 벌이다. 누가 가질지 ‘100분 토론’이 필요한 밤이었다.

프라이부르크=조영래 우승호 씨 cy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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