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작곡가 푸치니(1858~1924)는 서양 중심의 시각에서 동양을 타자화한 오리엔탈리즘을 가장 잘 활용한 작곡가입니다.
그의 오페라 중 '나비부인'이 일본에 대한 오리엔탈리즘을 투영했다면 '투란도트'는 중국에 대한 오리엔탈리즘이 투영된 작품입니다. 푸치니가 활약한 19세기 말~20세기 초가 서양열강의 동아시아 침탈이 벌어진 시점과 맞물려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두 작품은 모두 동양 여성이 주인공입니다. 서양과 동양을 남성 대 여성, 이성 대 감성, 정상 대 비정상, 선 대 악의 이분법으로 파악하는 것이 오리엔탈리즘의 기본공식입니다. 나비부인(초초상)이 오리엔탈리즘의 왜곡된 시선에 순응하는 순종적이고 귀여운 동양여성 상을 담아냈다면 투란도트 공주는 그에 반항하는 야성적인 팜 파탈로서 동양여성상을 그려낸 것입니다.
이는 서양인의 눈에 비친 일본과 중국의 인상과도 결부돼있습니다. 일본은 탈아입구(脫亞入歐)의 기치를 높이 들고 '작은 유럽'이 되고자 몸부림 친 서구화의 모범생인 반면 칭기스칸 시절부터 공포의 대상이었던 중국은 전통적 화이관에 입각해 서구화에 강력히 반발한 반항아 내지 지진아였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오리엔탈리즘 연구의 비조(鼻祖)인 에드워드 사이드도 지적했듯이 서양인의 욕망과 환상이 투여된 이런 왜곡된 이미지를 동양인들이 확대 재생산해왔다는 점입니다.
일본은 나비부인을 서양에 일본의 이미지를 널리 전파하는 문화상품으로 적극 활용했고 중국은 이 작품이 중국을 비하한다며 공연을 금지시키다가 1990년대부터 이 작품을 자신들 문화상품으로 적극 향유하기 시작했습니다. 장이머우가 연출한 자금성 공연이 대표적이죠.
투란도트가 공주로 있는 황제국의 제후국 왕자로 등장하는 칼리프 역의 주성중 씨
두 경우 모두 자국에 대한 가학적 시선을 피학적으로 향유하는 '욕망의 전도'가 발견됩니다. 그런데 좀 더 흥미로운 경우는 중국의 투란도트 향유입니다. 투란도트는 본디 '천일야화(千一夜話)'의 자매작인 '천일주화(千一晝話)'에 등장하는 투란독트 공주의 이야기였습니다.
투란은 페르시아제국 령 중앙아시아의 지명이고 독트는 딸을 뜻하는 영어 daughter의 축약형이므로 '투란의 딸'이란 뜻입니다. 결국 중앙아시아 왕국 공주의 이야기가 번역과 창작과정에서 중국 공주의 이야기로 바뀐 것입니다.
그 과정을 들여다보면 충분히 수긍할만한 요소가 숨어있습니다. 투란도트는 얼음처럼 차가운 공주인데 이는 13세기~15세기 유럽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칭기즈칸 제국의 이미지가 투영되면서 중국을 정복한 몽골제국의 공주로 설정된 것입니다.
작중 칼리프 왕자의 부왕의 이름 티무르 역시 칭기즈칸의 후예로 14세기 중앙아시아에서 인도에 걸친 별도의 대제국을 세운 티무르에게서 따온 것입니다. 따라서 무대는 중국 베이징이지만 주인공은 모두 몽골인입니다.
중국이 이 작품을 싫어한 이유도 여기에 숨어있습니다. 중국인 공주가 아니라 중국을 정복한 몽골인 공주와 역시 중앙아시아에 대제국을 세운 몽골계 왕자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중국인으로는 투란도트의 겁 많은 신하로 등장하는 핑 팡 퐁과 공주의 명으로 잠조차 마음대로 잘 수 없는 불쌍한 중국인 백성들뿐입니다.
이를 한국적 상황으로 바꿔 말하자면 한국이 무대긴 하지만 정작 그 주인공은 일본인 조선총독의 딸과 몰락했지만 역시 일본인인 대만총독의 아들의 사랑을 그린 오페라를 떠올리시면 됩니다. 한국인들은 조선총독의 일본인 딸 때문에 잠도 못자고 전전긍긍하는 관리나 경성시민들로만 등장하는 셈이지요. 여러분 같으면 이런 작품을 경복궁에서 자랑스럽게 공연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중국인들은 그걸 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대제국을 운영했던 중화민족주의를 선양하는 문화상품으로 적극 활용하고 있습니다. 왜일까요?
몽골의 역사도 중국의 역사로 적극 포섭하기 위한 대중화민족주의의 일환인 것입니다. 그 원형이 페르시아이건 중앙아시아건 몽골이건 사람들이 중국으로 호명하는 것을 몽땅 자국역사로 빨아들이기 위한 심모원려의 포석인 셈인 것입니다.
투란도트 자금성 공연이 이뤄진 1997년은 하상주단대공정이 시작되고 1년이 지난 뒤입니다. 단대공정은 중화민족을 구성하는 55개 소수민족의 역사를 모두 중국의 역사로 편입하려는 역사공정의 출발점입니다. 2002년 시작된 동북공정도 엄밀히 말하면 8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그 역사공정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입니다.
게다가 그 공연을 연출한 장이머우는 그동안 중국에서 폭군으로 맹비난 받던 진시황을 중화민족 대통합의 시조로 미화한 영화 '영웅'(2002)의 감독입니다.
영어의 차이나와 일본의 지나의 어원이 진나라에서부터 출발한다는 점 기억하시지요? 외부에서 중국을 호명할 때 기원이 됐던 그 제국을 일군 진시황의 모든 악행을 덮을 만큼 위대한 요소가 바로 중국을 일통한 것이라는 게 이 영화의 기본 발상입니다.
그것이 감독의 개인적 신념일지는 몰라도 55개 소수민족의 통합국가를 유지하겠다는 중국공산당 지도부의 정통성을 기원전 3세기까지 확장해준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오페라 투란도트에는 이렇게 제국주의적 시선이 이중으로 얽혀있습니다. 야성미 넘치는 팜 파탈로서 동양을 길들이겠다는 서양 제국주의의 시선과 그 왜곡된 시선을 껴안으면서 통합국가로서 대제국의 이미지를 전유하려는 중화제국주의의 시선입니다.
물론 이 오페라를 작곡한 푸치니나 연출한 장이머우가 이를 의식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의 예술작품이 탄생하고 향유되는 과정에서 작가나 연출가도 의식하지 못했던 시대적 집단무의식이 투영된다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마찬가지로 오페라 투란도트는 이러한 역사적 맥락과 독립된 보편성을 지닙니다. 중국 또는 몽골의 공주가 아니더라도 남자와 결혼을 죽도록 싫어하는 여성은 동서양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습니다.
또 공주의 왜곡된 이성관을 깨부수고 진정한 사랑을 쟁취하는 남성의 이미지 역시 항시 그와 짝을 이루는 법입니다. 우리의 '서동요'가 그러하고 셰익스피어의 '말괄량이 길들이'가 또한 그러합니다.
오페라 '투란도트'에서 공주에게 꼼짝 못하는 관료 핑 퐁 팡은 뮤지컬 '투란도'에선 공주를 농락하는 환관 하 마 새 3인방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이 오페라를 굳이 장르를 바꾸거나 번안해 공연하려 한다면 이 작품에 투영된 왜곡된 복선을 걷어내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작품이 간직한 원형의 미학은 살리되 그 배경에 깔려있는 문화적 편견을 도려내지 않는다면 원작에 무의식적으로 깔려있는 이데올로기를 확대 재생산해는 꼴밖에 안되기 때문입니다.
김효경 서울시뮤지컬장이 취임 후 첫 작품으로 선보인 뮤지컬 '투란도'를 보면서 결정적으로 아쉬운 대목이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김 단장은 한국 뮤지컬이 뮤지컬 고유의 매력을 살리지 못하는 이유로 2가지를 꼽았습니다. 하나는 해외에서 수입된 라이선스 뮤지컬의 범람이고 다른 하나는 스타 마케팅의 중독이었습니다. 매우 적실한 지적입니다.
그가 서울예대 연극과 석좌교수시절부터 제자들과 오랜 시간 벼려낸 '투란도'는 바로 그런 한국 뮤지컬의 답답한 현실의 돌파구로서 제시된 작품입니다. 오페라 투란도트를 뮤지컬 개작한 이 작품은 라이선스 뮤지컬이 아닌 창작뮤지컬이면서 스타 배우 없이 서울시뮤지컬단원 중심으로 출연진을 짰습니다. 그럼에도 역동적인 무대, 힘이 넘치는 음악, 드라마틱한 이야기 구성으로 관객을 사로잡는 매력을 뿜어냅니다.
신예 무대디자이너 최영은 씨는 살짝 곡선이 가미된 4개의 반투명 철망구조물을 결합하거나 분할하면서 성벽과 궁궐, 저자거리의 풍경을 역동적으로 구축했습니다. 또한 그 구조물 외벽에 다양하면서도 미묘한 무늬를 영상으로 투사하는 방식으로 작품이 필요로 하는 정서적 효과를 잘 살려냈습니다.
김민정 조원영 두 작곡가가 작곡한 음악은 푸치니의 오페라와 전혀 다릅니다. 오페라에선 다음날 해가 뜨기 전에 자신의 이름을 알아내라는 칼리프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투란도트가 베이징의 백성들에게 잠을 자지 말 것을 명령하는 것을 지켜보며 칼리프가 부르는 '공주는 잠 못 이루고' 아리아가 가장 유명합니다. 반면 뮤지컬에선 칼리프와 투란도가 서로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는 넘버에 음악적 방점이 찍혀있습니다.
오페라와 다르지만 워낙 고음역의 가창력을 요구하는 음악이라 뮤지컬 전문배우들도 소화하기 만만치 않은 곡이 많습니다. 가성을 동원해야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고음처리에서 불안한 장면도 많고 심지어 음이탈이 이뤄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극적 긴장감을 강조한 탓에 강렬한 노래가 많은 대신 오페라에서 핑 팡 퐁의 3중창처럼 서정적이면서도 유머감각이 넘치는 노래를 찾아보기 힘든 점도 아쉽습니다.
정가람 씨의 극본은 푸치니가 미완성작으로 남기고 숨지는 바람에 음악적 완성도에 비해 극적 구성력이 떨어진다는 지적을 받았던 오페라 원작의 약점을 많이 보완했습니다. 우선 투란도트 공주의 이름을 '그림으로 그려진 난'이란 한자어 투란도(投蘭圖)로 의역해 현실성을 높였습니다.
무력한 관료 핑 팡 퐁을 대신해 타타칸 음모의 실행자로 등장하는 하 마 새 환관 3인방이 마스크를 쓴 군무진과 펼치는 그로테스크한 무대.
공주가 결혼을 거부하는 이유를 외적에 유린당한 먼 옛날 공주에 대한 기억 때문이 아니라 자신을 내시로 만든 것에 대한 복수로 황실의 대를 끊으려는 타타칸(박봉진)이라는 환관의 음모에 속아 넘어간 것으로 설정했습니다.
오페라에 등장하지 않는 악의 근원으로서 타타칸이란 한명의 인물로 바꿔 구체화시킨 것입니다. 그러면서 원작에서 공주에게 꼼짝 못하는 무기력한 중국인 관료들로 웃음을 자아내는 핑 팡 퐁을 타타칸을 추종해 공주를 농락하는 못된 환관 새 하 마로 새롭게 설정해 극적 긴장의 밀도를 강화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원작이 지닌 오리엔탈리즘을 너무 쉽게 간과했습니다. 투란도의 나라를 명쾌히 어떤 나라라고 설정하진 않는 방식으로 여기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극 내용의 절반 이상이 원작 그대로 채택한 까닭에 중국으로 비칠 수밖에 없습니다.
몽골어도 아닌 한자어로 바꿔버린 공주의 이름, 중앙아시아를 연상시키는 이름을 지닌 칼리프의 왕국이 투란도의 제후국이란 설정, 환관들이 제후 이상의 권력을 휘두른다는 설정, 임금이 자신을 천자라고 칭하는 점, 황실과 환관의 의상이 중국풍이라는 점 등이 다 그렇습니다.
이런 극적 장치는 오히려 오페라에서 몽골인으로 설정된 주인공들을 중국인으로 환치시켜버리는 효과를 낳고 맙니다. 중국이 '투란도트'를 전유한 문화적 책략에 포섭돼버린 결과를 낳고만 것입니다. 기마민족으로 중국을 점령했던 위구르 거란 여진 몽골을 모두 중국이란 하나의 대제국의 역사로 수용해버린 꼴이 돼버린 것입니다.
더 기막힌 점은 투란도 제국의 백성들에게만 한복을 입힌 것입니다. 외국에서 이 작품이 공연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안 그래도 중국의 문화적 플레이로 인해 중국인들의 오페라로 알고 있는 이 작품의 피지배자들이 한복을 입고 나온다? 안 그래도 한국을 자신들의 속국 취급하는 중화민족주의의 설계자들이 쾌재를 부르진 않을까요?
뮤지컬 '투란도'에선 금속망을 엮어서 만든 4개의 곡선 구조물을 붙였다 떼었다 하면서 역동적 무대를 만들어낸다. 사진은 투란도 공주의 내실을 형상화한 장면.
만일 제가 이 작품의 극작가나 연출가였다면 둘 중 하나를 택했을 것 같습니다. 첫째는 투란도를 고조선이나 신라의 공주로 설정하고 칼리프를 서역에서 온 처용과 같은 인물로 설정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투란도를 원작 그대로 중국이 아닌 몽골의 공주로 설정하고 칼리프를 고려의 왕자나 발해 왕가의 먼 후손으로 설정하는 것입니다.
이런 설정은 결코 또 다른 민족주의의 확산이 아닙니다. 서양이 타자화한 동양의 낯선 이야기를 오히려 우리 자신의 이야기 구조 속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원작의 보편적 매력을 풍성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또한 역사상 중원을 점령했던 모든 민족의 역사를 중국으로 일원화하려는 중국의 무차별적 역사농단에 맞서 오페라 '투란도트'를 구해내는 길이기도 합니다.
오페라를 왜 굳이 뮤지컬로 봐야하느냐를 대중화의 관점에서만 봐선 안 됩니다. 번역이건 번안이건 재창작이건 거기에 가장 필요한 것은 문화적 주체의식입니다.
라이선스 뮤지컬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설득력을 얻기 위해서라도 '투란도'는 한국적 뮤지컬로 거듭 날 필요가 있습니다. 원작 내부의 미궁에 빠져서 그 뒤에 감춰진 오리엔탈리즘의 미궁(迷宮)을 간과한 것은 아닌지 다음 공연에선 이에 대한 제작진들의 혜안을 기대해봅니다.
투란도 역으로 이연경 씨 외에 홍본영 윤지영 씨가 번갈아 출연하고 칼리프 역으로 주성중 씨와 함께 박인배 씨가 출연. 3만~5만 원. 25일까지 서울 종로구 세종로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 02-399-1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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