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드라마캐릭터열전⑮] ‘짝패’의 천둥, 영웅 자격이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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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3월 16일 10시 2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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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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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늘했다. 냄새나는 더러운 몸으로 저잣거리를 돌아다니며 비럭질을 하는 신세에 어울리지 않게 그의 눈길에는 서늘한 냉기가 흘렀다.

그렇다고 부모에게 버림받았다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거나 마음 가는 책을 읽을 수 없어 한탄하며 세상을 냉소하는 것은 아니다. 넘을 수 없는 4차원의 벽처럼 그의 발목을 잡아채고 있는 엄격한 신분제를 증오하거나 양반의 자제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호사를 누리는 자들에 대해 분노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하고 싶은 글공부를 하겠다는 노력이 한 여름 뙤약볕의 지렁이만도 못한 것으로 인식되는 것이 싫었다. 깊고 그윽한 그의 눈동자에 서늘한 냉기가 가득 찬 것은 그래서였다.

슬픔이나 눈물 따위의 감정도 그에게는 사치였다. 바깥세상의 엄격한 신분질서를 못마땅해 하면서도 그것을 고스란히 빼박은 권력 구조가 작동하는 거지들의 움막촌에서 살아남기 위해 열심히 동냥질을 하는 그에게 슬픔이나 눈물의 감정은 표현해서는 안 되는 사치스러운 감정일 뿐이었다.

하지만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만큼은 지워지지 않았다. 자신이 누구의 아들인지 궁금한 것보다, 그저 자신의 곁에 존재하지 않는 어머니가 그리울 뿐이었다. 양반집 아들의 유모가 어머니라는 소문을 들은 뒤부터 마음이 요동쳐서 견딜 수 없었던 것도 그래서이다.

하지만 어머니가 그를 부정하는 순간, 사치스런 감정이라고 생각했던 눈물이 쏟아졌다. 깊고 그윽한 눈동자에서 쏟아지는 눈물과 함께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도 지워졌다.

냉기가 흐르던 깊고 그윽한 눈동자에서 사치스러운 감정이라 여기며 부정했던 눈물을 쏟아내게 만든 어머니로부터 존재를 부정당한 그는 운명의 장난에 휘말린 희생자였다. 그토록 애타게 찾던 어머니는 그가 태어나면서 세상을 떠났고, 그가 어머니라고 생각했던 유모는 그의 운명을 자신의 아들과 바꿔치기한 몹쓸 여자였다.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여의고 유모에 의해 운명이 엇갈려 거지 움막에서 동냥젖으로 성장한 그는 '환경'에 지배받는 비극적 운명의 주인공 천둥(노영학/천정명)이다.

사회적 혼란이 극도로 심했던 조선 말기에 노비와 거지, 갖바치, 백정, 왈자패 등 엄격한 신분제에서 차별받고 소외당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민중사극 '짝패'(김운경 극본, 임태우·김근홍 연출)의 천둥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비극적 운명의 나락으로 떨어졌다가 자신의 의지로 모순투성이의 세상과 맞서는 존재이다.

그의 비극은 유모 막순(윤유선)의 계략에 의해 거지 움막촌에서 성장했지만 양반의 핏줄답게 책 읽기를 좋아하는 성정에서 비롯한다. 글이 고파 찾아간 서당에서 성초시(강신일)의 제자가 된 천둥은 거지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선비가 되겠다고 다짐한다.

"이 세상 사람들아! 나를 똑똑히 지켜 보거라! 나는 걸인이 아니다! 두고 봐라. 나는 글을 배워 세상을 이롭게 하는 참 선비가 될 것이다!"라고 소리치는 어린 천둥의 다짐은 그가 부딪쳐 극복해야 할 세상과의 첫 번째 대결이었다.

(사진제공=MBC)
(사진제공=MBC)

사회적 혼란이 극심했으나 여전히 신분제가 엄격했던 시대에 거지 신분으로 글을 배워 선비가 되겠다는 천둥의 발상은 가히 혁명적이었다. 천둥은 비슷한 또래의 학동들이 서당에서 글 읽는 소리를 들으며 글공부를 하고, 거지 신분으로 공부하는 것이 마땅치 않아 아무도 접근하지 않는 상여막에서 책 읽기에 매진하면서 "모든 사람이 양반이 되는 세상"을 만드는 꿈을 키워 나갔다.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천민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들이 '양반'이 된다면 세상이 좋아질 것이라는 게 소년 천둥의 생각이었다. 요즘 식으로 이야기하면, 천둥은 모든 사람이 평등한 민주주의 사회를 꿈꾸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꿈을 이루기엔 천둥의 처지가 너무나 보잘 것 없었다. 게다가 천민 신분으로 글공부를 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힘이 되는 절대적인 친구, '짝패'가 생겼다. 유모로 알고 있는 어머니의 계략 덕택에 좋은 환경에서 양반의 자제로 성장하던 귀동(최우식/이상윤)이 천둥이 앞에 나타난 것이다.

천둥이 귀동과 처음부터 절친했던 것은 아니다. 이들은 처음 상여막에 나온다는 귀신을 쫓기 위해 호기롭게 찾아갔다가 귀신으로 분장한 천둥에게 놀라 바지에 소변을 지릴 정도로 놀라 도망쳤던 귀동이 상여막 귀신 소동의 전말을 알게 된 뒤 천둥이 애지중지하던 책들을 빼돌리면서 적대적으로 만났다.

몸과 몸이 부딪치는 싸움을 통해 서로의 장점을 알게 된 두 사람은 신분의 귀천을 떠나 짝패가 된다. 한 여인의 욕심으로 운명이 뒤바뀐 양반과 천민이 짝패가 되는 과정은 사내아이들의 우정을 넘어서 봉건적 신분제에 발생하기 시작한 균열을 상징한다.

하지만 아무리 신분제의 근간이 흔들리는 조선 말엽이었다 해도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매관매직으로 부임한 신임 현감은 부정부패를 일삼으며 백성들을 괴롭히고, 탐관오리의 학정 때문에 끼니거리가 마땅치 않고 억울하게 죽어가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삶은 더욱 피폐해졌다.

그릇된 세상을 바로 잡기 위해 양식 있는 선비들이 뜻을 모으지만, 그것을 눈치 챈 현감 세력에 의해 천둥의 스승이었던 성초시가 죽음에 이르게 된다. 거지를 제자로 받아주었던 스승의 죽음에 분노한 천둥은 저자거리 순행에 나선 현감을 향해 칼을 겨눌 계획을 세우며 민란의 우두머리인 강포수(권오중)의 무리에 가담하기로 결심한다.

귀동의 외삼촌이기도 한 현감의 폭정을 견디지 못한 백성들이 강포수의 주도로 민란을 일으키고, 귀동은 아버지 김진사와 함께 야반도주를 하다가 강포수 일행에게 붙잡히는 신세가 된다.

천둥은 "내 스승을 죽인 원수"라고 소리치며 김진사의 목을 향해 칼을 겨눈다. 아무 것도 모른 채 운명의 장난에 휘말린 부자지간에 살인이 벌어질 위기의 순간이다.

번득이는 칼날이 금방이라도 피를 볼 것 같은 상황에서 소년 천둥은 거지와 짝패의 연을 맺어준 친구 귀동을 생각하며 칼을 거둔다. 자신의 자리를 대신한 짝패와의 의리가 천둥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 구해준 것이다.

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아버지를 죽인 아들이 될 뻔했던 천둥은 10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상단의 행수가 되어 돌아온다. 외국과의 교역을 능숙하게 처리하는 능력이 뛰어난 상단 행수 천둥에게서 분노와 증오 그리고 슬픔과 눈물의 내면화에서 뿜어지던 서늘한 냉기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거지 출신이라는 신분의 한계를 절감하면서 회한에 잠기기도 하지만 그것은 그저 표피적인 것이었다. 10년 전 민란이 천둥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남아 있는 것은 그를 거지 출신으로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뿐이다.

천둥의 지시를 받아야 하는 양인들은 근본을 따지면 상전은 우리가 더 상전이다. 천둥은 원래 거지새끼다."라는 인식을 숨기지 않는다.

거지 출신이라는 신분의 한계를 극복한 것 같았으나, 여전히 그것이 족쇄가 되는 현실에서 천둥은 속 좁은 모습을 보여준다. "거지로 태어나 비럭질을 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출신이 비천하다고 해서 너희들까지 나를 업신여겨도 되는 것이냐!"라며 분통을 터뜨리는 천둥에게서 어린 시절 모든 사람이 평등한 세상을 만들겠다며 글공부에 매진하던 소년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게다가 "천출인 우리끼리라도 업수이 여겨서는 안 되는 것이다"라며 점잖게 질책하다가 "양반이 너희를 부리는 것은 되지만 내가 너희를 부리는 것은 배알이 꼴이냐?"라고 반문하는 천둥이 소학을 읽으며 "사람의 말과 행동이 같아야 된다"는 것을 깨우치던 거지 소년 천둥이었는지 의문이 들기까지 한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10년의 세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소년 천둥의 깊고 그윽한 눈동자에 담겨져 있던 서늘한 냉기가 어른 천둥의 맑고 부드러운 미소로 전이된 것은 너무 당혹스러웠다.

게다가 스승의 원수라며 칼을 겨누었던 김진사의 도움을 받아 또 다른 미래를 준비하는 천둥의 모습은 비굴함 그 자체이다.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극복해야 할 대상인 '아버지 세대'에게 의지하는 '자식 세대'의 모순이 비굴함으로 비쳐지는 것이다.

민란 이후에도 봉건적 신분제는 여전했고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은 현실에서 얼굴 가득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세상을 바라보는 천둥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어쩌면 그는 출신 성분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채 '민중 영웅'의 이미지가 덧씌워진 존재 아니었을까?

성인 천둥(천정명)에게서 소년 천둥(노영학)의 진정성을 느낄 수 없는 상황이 캐릭터의 자기모순에서 비롯한 균열 때문인지, 캐릭터에 어울리지 않는 부드러움의 카리스마를 억지로 밀어붙이는 배우의 부족한 연기력 때문인지 논란은 당분간 지속될 것 같다.

윤석진 충남대 국문과 교수·드라마평론가 drama@c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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