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뮤직] “결국엔 ‘역전만루홈런’을 날렸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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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11월 9일 14시 3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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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맨밴드 '달빛요정 역전만루홈런' 이진원을 보내며…

● 나에게는 영원한 '홈런형'…당신은 최고의 아티스트였어!
● 사상 최초로 '제작/유통/판매'까지 도맡은 진정한 '홍대인디'

진정한 \'홍대 인디\' `달빛요정 역전 만루홈런` 이진원의 생전 모습(동아일보 DB)
진정한 \'홍대 인디\' `달빛요정 역전 만루홈런` 이진원의 생전 모습(동아일보 DB)
수년전 고(故) 홍성민 선배의 죽음 이후 이 같은 사회적 분위기는 처음이다.
(그러고 보니 1980년대의 인기가수이자 그룹 '공중전화'의 보컬이던 홍성민도 뇌출혈로 쓰러져 일주일만인 2007년 8월6일 별세했다.)

충격적인 일이다. 대한민국에서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라면 상당수가 그와 적어도 한 페이지 이상의 추억은 갖고 있으니 말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홍대 주변의 자취방에서 콩나물과 멸치를 다듬으며 야구를 시청하던 그의 뒷모습이 떠오른다.

고 이진원은 지난 1일 뇌출혈로 자택에서 쓰러져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6일 오전 끝내 숨졌다. 모두가 그의 쾌유를 바랬지만 그는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의 묘비가 세워져 그를 짧게나마 설명해야 한다면 아마도 이 정도 일 것이다.

"2003년 원맨밴드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을 결성한 이진원은 2004년 1집 앨범을 발표하고 활발한 활동을 해왔던 대표적인 홍대 아티스트였다…."

■ 국내 유일의 원맨밴드…제작 유통 판매까지 혼자서

조금 더 길게 설명하면 이렇게 나올까?

"1973년생인 고 이진원은 홍익대 독어독문과를 졸업하고 홍대 주위에서 음악활동을 시작했으며 2003년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이란 이름의 원맨밴드를 결성했다. 국내에서는 거의 명맥이 끊긴 원맨밴드로서 2004년 정규 1집을 발표한 이후 6개의 앨범과 숱한 콘서트를 통해 적잖은 마니아 팬을 확보했다. 뇌출혈로 쓰러지기 이틀 전인 지난 10월30일에도 홍대에서 단독공연을 갖는 등, 죽음 직전까지 음악에 대한 열정을 보였다. 그의 대표작에는…."

그의 이력에서 엿보이는 '홍대 아티스트'라는 표현이 애잔하다. 그는 대표적인 홍대 아티스트였다. 이진원이 홍대독문과를 졸업하고 홍대 바닥에서 음악활동을 했다고 이 같은 타이틀이 붙는 것이 아니다. 그는 뼛속까지 인디였고 배고픔 속에서도 인디에 대한 자부심을 절대로 꺾지 않았던 예술가였다.

선배연주자이자 베이시스트인 서영도는 자신의 트위터에 "이 같은 달빛요정들이 홍대 앞 지하셋방에 무수히 많으며 그들이 작은 반딧불을 밝히며 살아간다… 죽은 뒤에 그들의 이름을 듣지 않게 모두 노력하자"라고 격려 아닌 격려를 보내기도 했다.

필자는 그를 '홈런형' 이라고 불렀다. 홈런형은 10월의 마지막 날(31일)에 공연을 끝마치고 한 선배가 낸 한턱을 거하게 먹고 마시고 혼자 사는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쓰러졌고 무려 서른 시간 가까이 바닥에 홀로 누워 있었다고 한다. 과연 그는 그 차디찬 바닥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마지막 순간에 아무도 곁에 없었다는 사실에 울적해진다. 누군가 곁에서 그의 이상을 알아채고 재빨리 병원으로 옮겼더라면 이런 비극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런 슬픔은 절대 남의 일이 아니다. 여전히 수많은 예술가들이 홀로 자취방에서 아침을 맞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혼자 살며 활동하는 예술가 사이에는 아침에 일어나면 서로 문자나 전화를 주고받자는 우스개 소리도 나올 정도다. 따지고 보면 예술과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는 '돈'의 문제이기도 하다.

일전에 횟집에서 마주친 홈런형은 "사람이 그래도 돈이 좀 있어야한다"라는 말과 더불어 "가늘고 오랫동안 음악생활을 즐기고 싶다"라는 요지의 말을 건넨 적이 있다. 자신의 우울한 현실에 대한 반성이자 책망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이 그는 자신의 책을 출간했고 음반도 여러 장 냈고 공연에도 자주 초청되는 등 나름 성공한 뮤지션이었다. 그는 절대 게으르지 않았고 최고로 부지런한 인생이었다. 눈을 떠서 잠들 때까지 항상 자신의 예술제품을 위해 일했고 그의 음악은 TV나 인터넷에서 꽤 인기리에 유통됐다. 그 정당한 대가가 그의 손에 들어오지 않은 대목이 유감이다.

■ 당신은 결코 스끼다시가 아니었어, 진정한 최고였어…

그는 자신이 음악인이자 예술가라는 점에 자부심을 가진 인간이었다.

자격도 없는 인간들이 별 근거 없이 음악인을 하대하는 경우 절대로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마음껏 비웃어 주었다. 필자는 그 점이 맘에 들었다. 사실 사회생활 속에서 쉽사리 그 같은 행동을 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모두가 비굴하게 음악활동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용기 있게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음악인도 흔치 않은 시대다. 예술가이기 이전에 용기 있는 모습을 후배에게 보여줬다.

그렇다고 그에게 현실감각이 결여된 것은 아니었다. "먹고 살아야 예술이 된다"는 그의 지론은 언제나 후배들의 화두가 되기도 했다.

홈런형의 음악과 공연들이 많았다는 사실은 비교적 가까운 주변에 있던 나도 미처 깨닫지 못했다. 같은 자리에서 내 소리를 내느라 그 흔한 뒤풀이도 거하게 나눈 기억이 많지 않다. 새로 산 기타를 자랑하며 '이번엔 어떤 악기를 살까?' '무슨 노래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들려줄까'하며 방긋 웃었던 '홈런형'….

이제 이 글을 보내고 결혼식에 다녀와 그의 장례식에 가야 한다. 희비가 교차하는 순간 지금 필자가 쓰는 연재의 타이틀이 '홈대 인디열전'이란 것에 감회가 새롭다. 그의 빛나는 노래들이 이제야 세상에 알려지고 정당하게 평가 받는 현실이 거북하고 부끄럽다.

공중파 예능프로그램에 나오는 유명 MC들의 프로젝트밴드(실상은 아마추어 수준도 못되는)가 '대한민국음악상 록부문 후보'에 오르는 게 우리 음악계의 현 주소다. 자신의 창작품을 내는 진짜 음악인들은 제대로 된 수익도 분배받지 못한 채 쓸쓸히 죽음을 맞이한다.

이런 현실에서 그는 막 다른 세상으로의 여행을 떠났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 여정을 시작하기 전에 대한민국에서 예술행위로 살고 있는 모든 이들의 머리에 첫눈과도 같은 하얀 표백제를 머리에 부어주고 떠났다.

[나의 노래]- 故이진원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

덤벼라 건방진 세상아
이제는 더 참을 수가 없다
붙어보자!
피하지 않겠다!
덤벼라 세상아!
나에겐 나의 노래가 있다
내가 당당해지는 무기
부르리라
거침없이
영원히 나의 노래를

나 항상 물러서기만 했네

나 항상 돌아보기만 했어
남들도 다 똑같아 이렇게 사는 거야
그렇게 배워왔어 속아 왔던 거지

덤벼라 건방진 세상아
이제는 더 참을 수가 없다
붙어보자 피하지 않겠다 덤벼라 세상아
나에겐 나의 노래가 있다 내가 당당해지는 무기
부르리라 거침없이 영원히 나의 노래를

김마스타 / 가수 겸 칼럼니스트 sereeblues@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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