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 힘으로 짓밟은 제국주의 행위” 日 지성들 입을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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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5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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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일 공동성명 발표의미

“한국측 해석이 맞다”
“병합의 역사 되돌아보면 日의 합법 해석 유지못해”

‘불법’ 표현 막판에 넣어
“한국정부의 기존의견 지지”日측 간접적으로 ‘불법’ 인정

양국 역사 화해 출발점?
日주류 인식변화 벽 높아 “정권 담당자의 결단 필요”

“‘한국병합’ 100년 일한 지식인 공동성명” 서명자들이 10일 일본 도쿄 일본교육회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성명의 취지와 경위를 설명하고 있다. 앞줄 왼쪽부터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 아라이 신이치 이바라키대 명예교수, 야마다 쇼지 릿쿄대 명예교수, 나카무라 마사노리 히토쓰바시대 명예교수. 도쿄=김동주 기자
“‘한국병합’ 100년 일한 지식인 공동성명” 서명자들이 10일 일본 도쿄 일본교육회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성명의 취지와 경위를 설명하고 있다. 앞줄 왼쪽부터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 아라이 신이치 이바라키대 명예교수, 야마다 쇼지 릿쿄대 명예교수, 나카무라 마사노리 히토쓰바시대 명예교수. 도쿄=김동주 기자
한국과 일본의 지식인 213명이 10일 발표한 공동성명서는 한일강제병합조약의 불법성을 일본 지식인들이 처음으로 공개리에 합의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 일본 지식인들은 그동안 ‘유효(합법)부당론’을 주장해 왔으나 이번에 한국의 견해인 ‘무효(불법)부당론’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김진현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건립위원장은 “한국과 일본의 지식인들이 100년 전의 한일병합조약이 불법부당하고 원천적으로 무효라는 것을 합의한 것 자체가 의미 있는 일”이라며 “이 성명의 내용이 양국 정부의 공동체 인식에 기초를 제공해 올해 8월 15일쯤에는 양국 정부의 공동 성명이 나오길 간절히 기원한다”고 말했다.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도쿄대 명예교수도 △한일병합조약이 강제로 이뤄졌고 △불의부당한 조약으로 무효이며 △한일 양국 정부 간에 어긋나는 해석과 관련해선 ‘조약이 당초부터 무효’라는 한국 측 해석을 따라야 한다는 3가지가 핵심이라고 설명했다.

○ 병합 과정의 ‘강제성’ 합의 서술

한일 지식인들은 성명서에 “그간 두 나라의 역사학자들은 일본에 의한 ‘한국병합’이 일본 정부의 장기적인 침략전쟁, 일본군의 거듭된 점령 행위, 명성황후 살해와 국왕과 정부 요인에 대한 협박, 그리고 이에 대한 한국인들의 항거를 짓누르면서 실현시킨 것임을 명백히 밝혔다”며 한일강제병합 과정을 자세히 기술했다. ‘역사적 정설’로서 병합조약의 경과를 확정 서술해 둘 필요가 있다는 일본 측의 의견을 반영한 결과다.

성명서에는 일본 군대가 1875년 강화도에 군함을 보내 포대를 공격하고 점령하는 군사작전을 벌인 것을 시작으로 국왕에게 공포감을 주고자 명성황후를 살해한 일, 1907년 고종 황제가 헤이그 평화회의에 특사를 보낸 일로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군대를 해산시켰다는 사실도 명시했다.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는 “한국인의 입장에서 보면 별로 놀라울 것 없는 사실들의 기술로 보일 수 있지만 일본 지식인들이 요구해 한일강제병합 과정에서 일어난 강제적이고 불법적인 사실들을 합의해 기술했다는 점에서 평가해야 한다”고 말했다.

○ ‘불법’ 단어 발표 전날에 넣어

성명서 문구 조율 과정에서 가장 논란이 된 단어는 ‘불법’이었다. 1965년 한일기본조약 2조에 있는 ‘이미’를 해석하는 한국 정부의 입장을 “한국 정부는 ‘과거 일본의 침략주의의 소산’이었던 불의부당한 조약은 당초부터 불법 무효라고 해석하였던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이 대목에서 ‘불법’이라는 단어는 막판에 넣었다. 그 다음 문장은 한국 정부의 기존 입장을 지지한다는 내용이기 때문에 일본 측은 직접 ‘불법’을 언급하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일본 지식인들 일부는 이런 방식으로라도 ‘불법’을 인정하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며 서명을 철회하거나 보류했다.

한일강제병합조약 자체의 결함을 설명하는 내용 중 “조약 체결의 절차와 형식에도 중대한 결점과 결함이 보이고 있다”고 못박았다.

김영호 유한대 총장은 “일본 사회의 분위기를 고려해 ‘불법’을 표현하지 않고 최대한 부드러운 표현으로 뜻하는 바를 표현할 수 있도록 했고, 일본 측에서 이를 용기 있게 수용했다”고 밝혔다.

○ 역사적 화해의 길은 아직 멀어

이번 공동성명이 양국의 역사적 화해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일본 사회에서는 아직 소수 의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날 일본 대표로 참석한 미야지마 히로시(宮島博史) 성균관대 교수는 “이번 공동성명이 강제병합에 무관심한 일본인들에게 생각을 정리하는 계기가 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일본 정부를 비롯한 사회 주류층의 인식을 바꾸는 것은 더 큰 벽이다. 일본 정부는 고노 관방장관 담화(1993년), 무라야마 총리 담화(1995년), 한일공동선언(1998년), 조일평양선언(2002년) 등에서 식민지 지배에 대해 완만하나마 전진된 역사 인식을 보여 왔지만 최근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 도지사 망언에서 보이듯 그에 대한 반발도 거세다.

일본 측 서명자들은 “일본 정부에 한일병합이라는 역사적 사실 자체를 부정하라는 게 아니라 조약에 대한 해석을 바꾸라고 요구하는 것”이라며 “이는 정권 담당자의 결단에 의해 가능할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도쿄=윤종구 특파원 jkmas@donga.com
▼韓 각계인사들 “환영”… 한일관계 발전 기대
日 언론들 차분한 어조로 발표 사실만 보도▼
■ 한국-일본 사회 반응

1910년 체결된 한일병합조약이 불법이며 원천무효라는 한일 지식인들의 공동 성명에 대해 여야 정치권과 시민사회, 각계 인사들은 일제히 ‘환영한다’고 입을 모았다. 일본 언론들은 비교적 차분한 어조로 성명 발표 사실만 전했다.

흥사단 문성근 기획국장은 “한일병합조약이 불법이라는 사실은 역사적으로 이미 밝혀졌기 때문에 이번 선언은 정당하다. 한일 양국의 양심적인 지식인들이 이 같은 활동을 꾸준히 이어 나가길 바란다”고 말했다.

바른사회시민회의 전희경 정책실장은 “일본이 과거사에 대한 명확한 사과를 하지 않는 상황에서 한일 양국의 지식인들이 뜻을 함께 모은 것은 의미가 큰 일”이라며 “이번 선언이 일본 사회 속에도 큰 반향을 일으키길 바란다”고 말했다.

남시욱 광화문문화포럼 회장은 “2002∼2005년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에 참여해 일본 학자들과 함께 토론했는데 그 경험을 통해 이번 선언에 참여한 학자들이 얼마나 고심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일본 학자들은 기록 자체를 남기지 말자고 할 정도로 완고한 자세를 가졌는데, 이번 공동성명서에 ‘불법’이라는 말을 넣은 것은 대단한 성과”라고 설명했다.

한나라당 정미경 대변인은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병합조약이 원천무효라는 한국 정부의 주장을 한일 지식인이 공통으로 받아들인 것은 당연한 일이고 환영할 일”이라며 “진실은 속일 수 없다는 역사적 교훈을 일본 지식인들도 알기 때문에 공동성명 발표가 가능했다고 본다”고 말했다.

민주당 우상호 대변인은 “지식인들이 이런 중요한 선언을 한 것은 미래지향적인 한일 관계 정립과 발전적인 관계를 위해 매우 의미 있는 일로 평가한다. 과거 현재에 있어 정리할 것은 정리하고 평가할 것은 평가하고 사과할 것은 사과하며 미래를 함께하는 관계가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날 공동성명 발표에 대해 일본 언론은 대체로 차분한 태도를 유지했다. 도쿄의 일본교육회관에서 열린 “‘한국병합’ 100년 일한 지식인 공동성명” 기자회견에는 서명자 104명 가운데 13명이 나와 성명의 취지와 경위 등을 설명했다. 회견장에는 주일 한국특파원들과 일본 언론인, 사회단체 활동가 등 30여 명이 참석했다.

아사히신문은 공동성명 발표 사실을 전하면서 “‘한국병합’ 100년에 대해 성명은 ‘일본이 한국 황제로부터 민중에 이르기까지 격렬한 항의를 군대의 힘으로 눌러 실현시켰다’고 표현했다”고 보도했다.

교도통신은 “‘한국병합’은 애초부터 무효, 일한 지식인 공동성명”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한일 연구자와 문화인 등 약 200명이 도쿄와 서울에서 10일 병합조약이 당초부터 부당하고 무효라는 점을 일본 정부가 인정하라고 요구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며 사실관계만 보도했다.

일본 언론은 대체로 공동성명을 신속하게 속보 뉴스로 취급하진 않았다. 공영방송 NHK는 이날 오후 7시 메인뉴스에서 이 소식을 전혀 다루지 않았다.

도쿄=윤종구 특파원 jkmas@donga.com
유성운 기자 polari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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