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뒷골목 출신 프랑스 극작가 장 주네(1910~1986) 탄생 100주년입니다. 사르트르로부터 '성(聖) 주네'란 역설적 칭호를 받은 주네는 연극계에선 외젠 이오네스크, 사뮈엘 베케트와 더불어 3대 부조리극 작가로 꼽힙니다. 셋 모두 프랑스를 무대로 활동했지만 이오네스크가 루마니아, 베케트가 아일랜드 출신의 이방인이라면 주네는 프랑스 내부의 이단아였습니다. 주네는 아버지를 모르는 사생아로 태어났습니다. 가정부였던 어머니는 그를 생후 7개월 만에 위탁아로 넘겼습니다. 입양아로 자라던 주네는 10대 시절부터 문제아가 됐고 거지, 도둑, 남창, 탈영병, 죄수로 젊은 날을 보냈습니다. 10여 차례의 절도전과가 있던 그는 감옥에서 서른셋의 나이에 시인으로 데뷔한 뒤 실존주의 계열의 소설과 부조리극 희곡을 발표했습니다.
지금 한국에서는 장 주네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그의 작품을 연극과 무용으로 펼치는 페스티벌이 열리고 있습니다. 5월30일까지 서울 대학로를 중심으로 열리고 있는 이 공연축제에서는 10편의 연극과 8편의 무용이 무대에 올랐습니다. 주네는 생전에 '엄중한 감시'(1947) '하녀들'(1947) '발코니'(1956) '검둥이들'(1958) '병풍들'(1961) 5편의 희곡을 발표했습니다. 여기에 사후 발표된 '스플랑디스'와 '엘르', 미완성 희곡을 토대로 2002년 초연된 '유형지' 3편이 더해지면 모두 8편입니다. 이번 축제에선 이들 작품 중 '병풍들'을 제외한 7편이 소개됩니다. 여기에 소설로 발표한 '도둑일기'(1949) 그리고 '하녀들'의 모델이 됐던 사건을 미국작가 웬디 케슬먼이 새롭게 극화한 '빠뺑자매는 왜?'(1982)도 무대화됩니다.
▶ 장 주네의 작품 이해를 방해하는 두 가지 요소
이들 작품 중 국내에서 비교적 많이 알려진 작품은 '하녀들'과 '도둑일기' 정도입니다. 그만큼 주네는 그 명성(?)에 비해 국내에 소개된 작품이 적은 희귀작가입니다. 범죄자에서 세계적 작가로 재탄생한 그의 인생역정 자체가 극적이라는 점과 현재 프랑스에서 가장 많은 공연이 이뤄지는 현대극작가라는 점을 감안하면 몹시 이율배반적 현상입니다. 저는 그 현상의 이유를 알기 위해 이번 페스티벌의 공연을 초연작 중심으로 열심히 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발견한 것은 주네의 작품 이해를 방해하는 2가지 요소를 발견했습니다. 불온함과 난해함입니다.
주제의 작품 속 주인공은 범죄자 내지 반사회적 존재입니다. 파리 한 복판의 호텔을 점거한 무장강도(스플랑디스), 여주인의 살해를 공모하는 하녀들(하녀들), 감옥에 수감된 죄수(엄중한 감시, 유형지), 백인여자를 사냥해 살해한 과정을 연극화하는 흑인들(검둥이들)…. 주네는 이들을 그저 사회적 부조리에 희생된 인물로 형상화하는 것을 떠나 부조리한 현실에 저항하는 반(反)영웅으로 그려냅니다. '스플랑디스'에선 무장 강도를 진압하려던 경찰이 오히려 강도들을 찬미하며 무장 강도로 전향을 감행하기까지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별 작품만 놓고 보면 소위 사회화가 잘 된 사람들로선 강한 거부감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종교적으로 권위가 있으며 성스러운 존재인 교황을 남성들의 성적 판타지 대상 핀업걸처럼 묘사한 연극 '엘르'의 공연 모습.
신성모독을 야기했던 이 작품은 국내에서도 처음으로 무대에 올랐다.(사진제공=창파) 여기에 매우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대사가 더해집니다. 그것은 매우 시적이기도 한데 이중삼중으로 길게 이어지는 프랑스어 번역체 문장을 들어야하는 관객에겐 이것도 고역입니다. 한마디로 눈으로는 기성질서를 전복하려는 불편한 내용을 견뎌야하고 귀로는 단순명쾌함 보다 복잡 미묘함을 선호하는 프랑스식 문체를 견뎌야 주네 작품의 실체를 대면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두세 편 가량을 보고나면 어느 정도 면역력이 생기면서 어두운 범죄자의 세계를 그려온 그에게 왜 '현대적 고행승'이란 별명이 붙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주네는 선악과 명암의 이분법이 지배하는 세상을 '위악(僞惡)의 제스처'로 무너뜨리려고 합니다. 선은 악의 대척점으로서 존재할 수 있고 빛은 어둠을 통해 자신의 존재의의를 확인합니다. 주네는 세상으로부터 미움 받고 저주 받는 악과 어둠의 시각에서 이런 이분법적 체계의 부조리함을 통박합니다. 이런 비판은 주인과 노예, 간수와 죄수, 지배와 종속, 가학과 피학의 이중주로 계속 변주됩니다. 이는 우리사회가 지배와 피지배의 권력관계를 교묘히 은폐하고 있음을 폭로한 미셸 푸코의 철학과 이어집니다. 주네의 연극은 그런 이분법적 세계의 감춰진 부조리를 시각적으론 폭로하고 청각적으론 정화합니다. '성 주네'라는 역설적 표현은 '어둠의 이름'과 '밑바닥의 논리'를 통해 옳음과 바름을 표방하는 속세의 허위와 때를 씻어 내려했다는 의미에서 주어진 것일 겁니다.
▶ 분칠하고 망사스타킹 신은 포르노스타 교황
연극 '엘르'의 공연 모습.(사진제공=창파) 극단 창파가 초연한 '엘르'(변영후 연출)는 이런 주네의 작품세계에서 몹시 이질적이면서도 그래서 더욱 매력적인 작품입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다른 작품 속 주인공과 달리 가톨릭 교회의 수장인 교황입니다. 빅토르 위고의 소설 '노트르담의 곱추'에서 '광인들의 교황'으로 뽑히는 콰지모도를 연상시키는 주네가 가장 성스러운 존재 교황을 전면에 다루는 작품을 썼다는 점이 흥미로웠습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작품 속 교황은 여성적 존재 그것도 아드레날린 넘치는 남성들의 성적 판타지의 대상으로서 핀업걸처럼 묘사됩니다.
제목 엘르는 영어의 She에 해당하는 3인칭 여성대명사입니다. 프랑스어로 교황은 le Pape로 남성명사이지만 그 호칭인 성하(聖下)에 해당하는 la Saintet가 여성명사이기 때문에 '엘르'로 부를 수 있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라고 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여성에겐 신부조차 불허하는 가톨릭교에서 교황을 여성화하는 것은 대단한 신성모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실제 주네 사후 4년 후인 1990년 이 작품이 프랑스에서 초연됐을 때 역시 만만치 않은 부조리작가 이오네스크가 객석에서 뛰쳐나갈 정도였다는 후문이 있을 정도니까요.
내용은 새로 선출된 교황의 초상사진을 찍기 위해 바티칸 궁을 찾은 사진사가 오랜 기다림 끝에 교황을 만나지만 여성처럼 분칠을 하고 망사스타킹과 롤러스케이트를 신은 교황을 만나 외설적 포즈의 사진을 찍는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공연에서 교황의 역할은 여배우가 맡아 사진사가 성스런 자세를 요구할 때마다 요염한 자세로 촬영에 응합니다. 사실 시각적으로는 대단히 파격적이지만 교황의 장황한 독백을 듣고 있노라면 내용이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교황은 자신의 포즈가 그토록 괴상망측할 수밖에 없는 비통함을 다섯 곡의 장황한 노래로 풀어냅니다.
그것은 목동이었던 자신이 신성한 존재로서 교황을 꿈꿨지만 막상 교황이 되고부터는 완전히 신성한 존재인 교황을 연기하는 것 외에 다른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신성한 환상을 충족시켜주기 위해 근엄한 표정으로 4개 대륙에서 1500만장의 사진이란 이미지로서 존재하는 교황은 그 존재양식에 있어서 남성들의 성적 환상을 관능적 포즈의 사진으로 충족시켜주는 핀업걸, 더 나아가 포르노스타와 다를 바 없다는 형식논리가 그로부터 도출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흰 법복을 입고 1500만장의 사진으로 존재하는 교황은 쓴 커피를 마실 때 사람들이 집어넣는 흰 각설탕과 같은 존재로 설명됩니다.
연극 \'엘르\'의 공연 모습.(사진제공=창파) 이미지가 현실을 압도하는 오늘날 현실을 이보다 강렬하게 풍자하는 것이 있을까요. 물론 현실의 교황이 연극 속 교황처럼 철저히 이미지로서 존재하는 것은 아닐 겁니다. 하지만 자신의 직책 또는 '캐릭터'에 부여하는 이미지에 의해 자신의 실체가 소외당하는 사람을 상징하는 존재로서 교황만한 메타포는 또 없을 것입니다. 주네는 이 지점에서 다시 가상현실이 현실을 지배하는 시뮬라시옹의 철학을 펼친 장 보드리야르를 만납니다. 성(聖)과 속(俗)은 하나라는 말을 이렇게 극명하게 보여주는 작품도 드물 것이란 생각에 무릎을 쳤습니다.
연극이 끝날 무렵 다시 관객의 의표를 찌르는 반전이 펼쳐집니다. 극중 내내 교황의 사진을 찍은 사진사 역시 사진사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존재였고 실제 사진사는 따로 있었다는 반전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미지의 지배를 받는 것은 비단 교황뿐 아니라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모습 아니겠습니까. 셀카 사진을 찍으면서도 얼굴이 작게 나오게 하는 '얼짱 각도'를 유지하고 싸이월드의 블로그 사진에도 '뽀샵'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우리라고 도발적 포즈로 자신의 실체를 감추고 있는 포르노 스타와 무엇이 크게 다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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