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 468명 집단입국, 그 후 5년]<2>탈북자 울리는 장애물들

동아일보 입력 2009-10-27 03:00수정 2009-10-31 06:12
공유하기뉴스듣기프린트
공유하기 닫기
“딱해서 일 줬더니, 뭣도 모르면서…” 월급 안주고 되레 호통

무직-비정규직 전전
이용당하고 놀림당하고…
10년차 의사가 간호조무 일
“한직장서 1년이상” 33명뿐

내일이 없는 삶
보조금 더해 한달수입 50만원
감자 한알로하루 버텨봤지만
또 먹고살 걱정 할줄은…
언제나 몸에서는 싸한 파스 냄새가 진동했다. 파스라도 붙여야 허리디스크를 이겨내고 ‘마트’로 출근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가족들끼리 마트에 와서 한 바구니 가득 물건을 사가는 모습을 볼 때면 집에 있는 아이 생각이 나 속이 상했다. 그래도 마트가 생계를 지탱해주는 소중한 일터였기에 이번만은 오래 다닐 생각이었다. 하지만 두어 달이 지났을까. 월급날이 지났는데도 월급이 들어오지 않았다.

“사장님, 월급이 안 들어온 것 같은데요.” 조심스러운 물음에 도리어 호통이 쏟아졌다. “원래 지금은 일 배우는 적응기라서 월급을 다 줄 수가 없어. 사정이 딱해서 일자리 줬더니만 뭘 아무것도 모르면서….” 김순옥(이하 가명·34·여) 씨는 여기 저기 수소문한 뒤 사장을 찾아가 월급을 달라고 따졌다. 끝까지 오리발을 내밀던 사장은 “고발할까요”라는 김 씨의 말이 떨어지고 나서야 월급을 줬다. “북에서 왔다니까 물정을 모른다고 생각했겠지요. 아무 것도 모르고 열심히 일하는 나를 그렇게 이용하려고 생각했다는 게 참 분하고 상처가 되더라고요.” 마트에서 일을 그만둔 뒤 김 씨는 요즘 가끔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계를 이어간다. 한 달에 손에 쥐는 돈은 보조금을 포함해 50만 원 남짓. 초등학교 4학년 아들을 누구보다 잘 키우고 싶지만 학원은 꿈도 꿀 수 없다.

○ 무직과 비정규직이 대다수


오랜 방황 끝내고… 탈북자 김세철 씨가 26일 서울 구로구 신도림동에 있는 용접공장에서 용접이 끝난 운동기구를 기계로 깎는 작업을 하고 있다. 김 씨는 탈북자 적응시설인 하나원을 졸업한 뒤 건설현장 등을 떠돌다 용접학원에서 기술을 배워 9월부터 이곳에서 일하고 있다. 박영대 기자
많은 탈북자가 한 직장에 정착하지 못하고 무직과 비정규직을 오가고 있다. 취재팀이 접촉한 200명 중 무직과 학생, 주부를 제외하고 직장이 있다고 답한 사람이 117명이었지만 현 직장에서 ‘1년 이상 일하고 있다’고 대답한 사람은 33명에 불과했다. 직장을 몇 번이나 옮겼느냐는 질문에는 “많아서 셀 수가 없다”며 대답을 회피하는 사람이 많았다. 이 물음에 응답한 68명 중 ‘직장을 5번 이상 옮겼다’고 대답한 사람이 11명이었다. 3번 이상 옮겼다고 대답한 이는 30명이었다.

“글쎄, 일곱 번인가 여덟 번인가. 하루 나갔다가 그만둔 식당도 포함해야 하나?” 순대국밥 집에서 일하는 박은혜 씨(30)는 현재 직장이 몇 번째 직장인지 제대로 기억하지도 못한다. 그는 식당과 호텔 청소원 일 등 7, 8군데를 옮겨 다녔다고 했다. 북한과 중국에서 한 고생에 비하면 일이 고된 것은 아니었지만 한 곳에 정착하지 못했다. 박 씨는 “월급이 적어서 그만 둔 경우도 있고, 월급이 괜찮은 곳에서는 주인과 싸워서, 또 어떤 곳은 너무 멀어서,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탈북자라고 놀려서 때려치운 적도 있다”고 말했다.

관련기사
탈북자들은 북한과는 완전히 다른 남한체제에서 ‘식당’ ‘청소’ ‘막노동’ 등 일용직을 제외하고는 선택권 자체가 없다고 입을 모았다. 북한에서의 직업도 구직에는 보탬이 안 되고 새로 기술을 배우려고 해도 어떤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할지 정보를 얻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몸으로 때우는 일을 할 수밖에 없다. 북한에서 군사전문학교를 나온 김세철 씨(43)도 하나원 수료 후 직장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방황하다 뒤늦게 용접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에 올 초부터 학원에 다녀 지난달부터 용접 회사에서 일하고 있다.

○ 북한 의사도 남한에선 간호조무사

북한에서의 전문성이나 화려한 경력도 학제(學制)부터 시스템이 완전히 다른 남한 사회에서 새롭게 적응하는 데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했다. 탈북자 200명 중 북한에서 직업이 교수, 교사, ‘당 일꾼(당원)’ 등 화이트칼라 계층은 29명이었다. 하지만 29명 중 2명만이 각각 연구원과 회사원으로 일하고 있을 뿐 7명은 무직상태였고 12명이 일용직, 환경미화원 등 단순노동직에 종사하고 있었다. 나머지 8명은 도시락 판매 등 자영업자였다.

북한에서 의사로 일했던 김영실 씨(45)는 올해 초 의사고시에 도전했다가 고배를 마셨다. 20년 전 의사자격증을 받고 10년 넘게 환자들을 돌봤지만 남한의 의사고시는 북한에서의 시험과는 또 다른 것이었다. 그가 의사만 고집했던 것은 아니다. 병원에만 돌아가면 된다는 생각에 간호조무사 학원을 마치고 간호조무사에도 도전했다. 그러나 2006년 들어간 병원에서는 환자들이 낯선 말씨의 간호조무사를 꺼렸다. 간호사들조차 키(142cm)가 자그마하고 낯선 북한 출신 간호조무사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조금만 실수를 해도 “아줌마는 도대체 왜 그래요”라는 날카로운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병원을 옮겨도 마찬가지였다. 주변의 격려로 도전했던 의사고시에서도 고배를 맛본 그는 이제 일도, 공부도 접고 복지관에서 요양보호사 강의를 듣고 있다. “자꾸 주변에서는 절 같은데 들어가서 공부해 의사고시에 다시 도전하라고 하는데…. 모르겠어요. 내 처지에 학원을 다닐 수도 없고….”

○ ‘내일은 없다’

이직과 무직을 반복하는 탈북자 중 상당수는 정부 보조금에 의지해 살아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에서 지원금을 받고 있는 탈북자가 47명이고, 이 중 31명은 지원금이 유일한 소득이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미래를 위해 저축이나 투자는 하지 못하고 하루하루 살기에 바쁜 악순환이 이어진다. 저축이나 재테크를 하고 있다고 대답한 사람은 21명(10.5%)에 불과했다. 저축하지 못하는 사람 중에는 생계를 걱정하는 사람도 많다.

조순옥 씨(36)는 한숨이 잦다. 지난달 둘째를 낳았지만 당장 분유며 기저귀 살 돈이 없다. 같은 해 한국에 들어온 탈북자인 남편도 위염과 위궤양으로 수술을 받고 난 뒤 누워있는 날이 많다. 생활비가 한 푼도 없는 날에는 아픈 몸을 끌고 일당 4만 원짜리 일용직 노동을 하러 나간다. 조 씨도, 남편 박 씨도 일정한 직업은 없다. 네 식구가 사는 40m²(약 12평)짜리 임대아파트도 이들에게는 버겁다. “보증금이 올라 올겨울만 버티고 서울 밖으로 나가려고요. 중국에서는 감자 한 알로 하루를 버티는 날도 많았어요. 가난을 피해 내려온 남한에서 먹고사는 것을 걱정해야 될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동국대 북한학과 고유환 교수는 “정착지원금 등 정부 보조금이 나오지만 초기 생활만 도울 뿐 제대로 된 직업을 찾고 남한 사회의 어엿한 구성원으로 정착하는 데는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며 “탈북자들이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경제적 감각과 능동성을 가질 수 있도록 지속적인 교육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장윤정 기자 yunjung@donga.com
Copyright ⓒ 동아일보 & donga.com
당신이 좋아할 만한 콘텐츠
동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