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185>

  • 입력 2009년 9월 21일 13시 5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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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라슈트의 준결승 경기를 담은 영상이 32초 나갔다. 동영상이 멈추자 배심원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강 판사가 앨리스에게 따지듯 물었다.

"서 트레이너가 여기서 발견한 게 뭡니까?"

앨리스가 답했다.

"9초에서 11초, 18초에서 19초 그리고 29초에서 30초 때 글라슈트의 목 부위를 봐주십시오."

앨리스가 영상을 되돌려 세 장면을 잡았다.

"목을…… 꺾는 것 말입니까?"

이번에는 석범이 답했다.

"맞습니다. 재판장님. 변주민 선수의 자료 화면을 30초만 이어서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허락합니다."

석범이 다시 허공에 동영상을 띄웠다. '변두리 격투가' 변주민이 전성기 시절 특별시연합 격투 대전에서 뛴 결승전 화면이었다. 30초 동안 변주민도 정확히 세 번 목을 꺾었다. 석범이 화면을 멈추자, 앨리스가 설명을 시작했다.

"일종의 틱입니다. 변주민 선수는 긴장하면 저렇게 목을 꺾지요. 서사라 트레이너는 변주민 선수의 오랜 친구입니다. 변 선수는 불법 사이보그 격투 시합에 출전하는 서 트레이너를 위해 특별 대련은 물론 시합장에 함께 가서 코치 역할까지 했습니다. 통나무집에서 서 트레이너가 죽기 직전 그러더군요. 글라슈트가 변주민 선수를 너무 닮았다고, 틱까지. 피고는 글라슈트의 머리에 변주민 선수의 뇌를 옮겨 넣었고, 서 트레이너가 이 사실을 눈치 채자 살해하려고 한 겁니다."

강 판사의 시선이 민선에게 향했다.

"피고 측 심문하세요."

민선이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천천히 앨리스에게 걸어 나가 증인석 탁자에 왼손을 얹었다. 앨리스의 목과 허리가 뒤틀렸다가 바로 잡힐 때까지, 민선은 침묵했다.

"증인은 현재 몇 퍼센트 기계 몸인가요?"

"그건 이번 사건과 관련이……."

민선이 말허리를 자르며 다시 물었다.

"증인은 묻는 말에만 답하십시오. 몇 퍼센튼가요?"

앨리스가 즉답을 미루고 석범을 쳐다보았다. 석범이 고개를 끄덕였다.

"95퍼센틉니다."

민선이 배심원석으로 걸음을 옮겼다.

"증인은 오랫동안 보안청에서 유능한 형사로 근무했으니, 기계 몸 비율이 몇 퍼센트를 넘으면 인권을 심사하는지 알고 있겠지요?"

"……90퍼센틉니다."

"기계 몸 비율을 90퍼센트 이상 넘긴 시민 중에서 인권을 인정받은 경우는요?"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2049년 현재까지 총 4332건의 심사가 있었지만 단 한 건도 인권이 인정되지 못했습니다. 하물며 95퍼센트 기계 몸을 지닌 증인의 주장은 특별시연합 법정에선 완벽한 증언이 아님을 상기시켜 드립니다. 정신적 육체적 상태에 대한 정밀 테스트가 필요하겠지요."

배심원 대부분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 판사가 불쾌한 빛을 감추지 못하고 민선에게 따졌다.

"피고는 남앨리스 형사를 증인으로 채택할 때 그 특수 상황에 관해 문제 제기를 하지 않고, 왜 이제야 자격을 문제 삼는 겁니까? 쌍방이 '특별한 조건'에만 합의한다면 100퍼센트 기계인 로봇도 증언할 수 있습니다."

"판사님! 물론 저는 특별시연합 법정을 존중합니다. 다만 원고 측이 얼마나 물증 없이 저를 살인마로 몰아세웠는가를 재판정에서 똑똑히 알려드리고 싶었습니다. 원고 측은 95퍼센트나 기계 몸인, 인권도 없는 로봇을 내세워 제게 여러 가지 죄를 뒤집어 씌웠습니다. 가능성으로만 존재하는 발언들을 확정된 사실인 것처럼 남발했지요. 글라슈트가 왜 목 관절을 저런 식으로 꺾느냐고요? 답을 드리죠. 서 트레이너가 제게 먼저 말하더군요. 준결승전을 위해 친구인 변두리 격투가 흉내를 내보기로 했다고. 최 볼테르 교수가 밤을 새워 그 격투가의 몸동작을 시뮬레이션 하여 글라슈트에게 심었다고. 시합이 끝날 때까지 저도 당연히 그런 줄 알았습니다. 설마 두 사람이 짜고 변두리 격투가의 진짜 뇌를 글라슈트에게 심었을 줄은 몰랐지요. 한 가지 보충설명을 드리자면, 남 앨리스 형사는 특수대 근무 내내 은석범 검사를 사모해왔습니다. 그래서 은 검사와 제가 연인 관계로 발전하자 질투심을 이기지 못하여 이런 누명을……."

"지금 무슨 소릴 지껄이는 게야?"

앨리스가 참지 못하고 증인석을 뛰어넘어 민선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석범이 뛰어나갔지만 한 박자 늦었다. 앨리스에게 멱살을 잡힌 채, 굵은 눈물 두 줄기가 민선의 뺨을 타고 흘렀고, <보노보>의 로봇 촬영감독은 그 눈물을 클로즈업 했다.

민선의 일방적인 승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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