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162>

  • 입력 2009년 8월 19일 14시 07분


볼테르와 석범의 허리를 양팔로 낀 글라슈트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찰스의 설득을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짧은 침묵의 순간이 흘러갔다.

휘익.

새우처럼 몸을 웅크렸다가 편 석범이 사선으로 맴을 돌았다. 그 힘으로 발을 뻗어 글라슈트의 뒤통수를 후려치려 했다. 그러나 글라슈트가 허리를 숙이면서 석범의 강철구두를 쥐는 동작이 더 빨랐다. 급습에 실패한 석범의 머리가 바닥에 닿기 직전, 글라슈트가 강철구두를 잡아 끌어올렸다가 힘껏 패대기쳤다.

우직.

소리와 함께 석범의 기계발이 부러지면서 뜯겨나갔다. 외발잡이 석범이 떼구루루 굴러 구석에 처박혔다. 구경꾼들이 비명을 지르며 계단을 뛰어 내려갔고, 찰스도 황급히 출입문을 닫고 사라졌다.

글라슈트가 뜯겨나간 무릎을 붙들고 신음하는 석범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볼테르가 미친 사람처럼 로봇의 가슴을 주먹으로 쳐댔다.

"괴물! 이 미친 놈아!"

글라슈트는 꿀밤을 먹이듯 볼테르의 이마를 주먹으로 가볍게 쳤다. 충격을 받은 볼테르가 정신을 잃고 축 늘어졌다. 글라슈트는 먼저 석범의 강철구두를 힘껏 세 번 짓밟았다.

석범은 고통을 참으며 글라슈트를 노려보았다. 볼테르의 축 쳐진 두 팔이 글라슈트의 허벅지 부근에서 찰랑거렸다.

이상행동!

네 글자가 석범의 머리를 스쳤다.

파괴력이 높은 로봇일수록 인간을 공격하지 않도록 프로그래밍 되어 있다. 위험을 느낀 로봇이 방어를 위해 인간을 공격하는 경우는 있지만, 그때도 살인이나 치명적인 부상을 입히는 지경까지는 이르지 않는다. 지금 글라슈트는 다르다. 로봇과 시합을 하듯 석범의 기계발을 뜯고, 볼테르의 머리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살인하지 말라'는 규율을 무시한 것이다.

글라슈트가 무릎을 접었다가 힘껏 내지르며 스탬핑을 시도했다. 목표 지점은 석범의 목이었다. 저 로봇발에 목을 눌리면 목뼈가 단번에 부러질 것이다. 석범이 뒷공중돌기로 스탬핑을 피했지만, 내려오면서 균형을 잡지 못하고 남은 무릎마저 삐끗했다.

글라슈트는 서두르지 않았다. 외딴 구석으로 쥐를 몬 고양이처럼, 압박은 하되 단숨에 달려들어 목숨을 끊지는 않는 것이다.

이것 역시 이상행동이다.

격투 로봇은 최단 시간에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 상대를 제압하도록 프로그래밍 되어 있다. 석범은 기계발을 잃었고 다른 발도 움직이지 못한다. 승리를 거두는데 이보다 더 유리한 조건이 있을까. 그런데도 글라슈트는 시간을 끈다. 이 싸움은 경기장에서 벌어지는 단순한 시합이 아니란 걸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석범은 스탬핑을 힘겹게 세 번 네 번 다섯 번이나 피했다. 몸을 돌리는 속도와 폭이 점점 줄어들었다. 네 번째는 목은 피했지만 귓불이 밟혀 찢겼고, 다섯 번째는 목 대신 어깨를 밟혀 뼈가 부러지고 말았다. 이제 상체를 좌우로 돌리는 것마저 자유롭지 못하다.

여섯 혹은 일곱 번째에서 끝이 날까. 정말 나와 볼테르를 죽일 생각인가. 아, 생각이라니…… 격투에 필요한 동작들 외에 로봇이 무슨 생각을 한단 말인가. 그렇지만 글라슈트는 정말 생각을 하는 것만 같다. 미리 이 순간을 기다려온 것처럼! 아, 정말 살아날 방법은 없는 걸까. 찰스와 구경꾼들은 벌써 멀리 이 건물에서 벗어났겠지. 보안청 경호로봇들이 출동한다고 해도, 이미 상황은 종료된 다음이리라. 아, 정말 이렇게 개죽음 당하긴 싫은데…… 방법이 없나. 정말?

글라슈트가 마지막 일격을 가하기 위해 발을 높이 들었다. 석범은 두 눈을 크게 뜬 채 그 발을 노려보았다. 한 움큼의 자비도 없는 필살의 기운이 허공에서 멈춘 금속 발바닥에 실렸다.

쾅!

그 순간 문이 벌컥 열리고 누군가 뛰어 들어왔다. 글라슈트의 시선이 출구로 향했다.

"괜찮아요?"

민선의 목소리다. 그녀가 위험하다. 그녀 혼자 글라슈트와 맞서는 건 바보짓이다.

"…… 당장 나가!"

"잠깐만 참아요."

민선의 목소리가 의외로 침착했다. 석범이 겨우 고개를 들어 출구 쪽을 쳐다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민선의 두 손에 엽총이 들려 있었다.

팡 팡 팡팡팡!

엄청난 총성이 울렸고, 연이어 쿠쿵 소리와 함께 글라슈트가 쓰러졌다. 붉은 피가 콸콸콸 전시장 바닥을 적셨다. 볼테르의 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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