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117>

  • 입력 2009년 6월 17일 13시 42분


이 세상에 우연은 없다.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 있을 뿐!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파일들을 보기 좋게 정리하겠습니다."

앨리스의 손놀림이 빨라지자, 파일들이 이리저리 자리를 바꾸며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또 새로운 이름 아래 다발로 묶였다.

"잠깐!"

석범이 외쳤다. '끔찍한 추억'이라는 파일이 화면 가운데서 반짝거렸다.

"남 형사! 저 파일부터 열어봐."

"알겠습니다."

앨리스가 파일을 열자, 그들이 방금 스티머스로 만났던 세 그림자의 일러스트와 함께 '끔찍한 추억'이라는 제목이 떴다. 편집자 주에 따르면, 최근 벌어진 사건을 현실감 있게 재현한 짧은 소설이라고 했다. 앨리스와 석범은 "1967년 SF소설가 필립 K 딕은 <도매가로 기억을 팝니다>라는 단편소설을 냈다"에서부터 시작해서, "그 고요한 새벽, 미성여고 졸업생 박열매 씨는 어느 '동네 한 바퀴' 사이트에서 '살인의 추억'을 소매가로 구입한 것이다."까지 단숨에 읽었다.

"문종은 모방범이었군요. 축구만세, 여자싫어, 버터플라이가 16년 전 저지른 짓을 흉내 냈습니다. 문종은 총 236건의 기사를 모았네요. 그런데 축구만세, 여자싫어, 버터플라이! 무슨 아이디가 이렇게 유치한지……. 경찰이 '불량 청소년들의 과격한 장난' 쯤으로 여길 만도 합니다. 어, 근데 이건 뭐지?"

앨리스의 시선이 'WORSHIP'이란 폴더에 머물렀다. 폴더를 열자, '축구만세', '여자싫어', '버터플라이'라는 하위 폴더가 다시 나왔다.

"천천히!"

석범의 명령에 따라 앨리스가 먼저 '축구만세'를 열었다. 수많은 개들이 축구공을 하나씩 밟거나 핥거나 비비며 찍은 사진들이 화면을 가득 덮었다. 그리고 그 사진들이 모두 뜬 후 중앙에 뚱뚱한 여자 사진이 박혔다.

"도그맘입니다."

앨리스가 외쳤다. 그녀는 분명 도그맘 시정희다.

앨리스가 재빨리 '여자싫어' 폴더를 열었다. 격투기 동영상이 아홉 개나 동시에 시작되었고, 그 주인공은 변두리 격투가 변주민이다.

앨리스는 변주민의 이름을 부르지도 않고, 마지막 '버터플라이' 폴더를 열었다. <버터플라이>라는 꽃가게 간판이 먼저 눈에 띄었고, 그 아래 꽃꽂이에 열중하고 있는 가게 주인 박말동의 사진이 한 장 한 장 나타났다가 지워졌다. 앨리스가 '꽃뇌'라는 별명을 붙인 바로 그 사내다.

"시정희, 변주민, 박말동! 모두 앵거 클리닉 노윤상 원장에게 같은 기간 치료를 받기로 예정되었던 환자들이야. 한데 공교롭게도 그들은 16년 전 박열매란 여성을 가상현실 사이트에서 죽였군. 그리고 그들을 추종하여 모방범죄를 일삼던 방문종도 이 상담치료에 합류했고. 어때 남 형사?"

"뭐가 말입니까?"

"우연일까?"

"네?"

"세 명의 살인범과 한 명의 추종자가 같은 병원에서 같은 시기에 치료받게 된 것이 우연일까? 그 중 셋은 뇌가 사라진 채 살해되었고, 추종자는 세 명의 살인범이 박열매를 죽였던 방식 그대로 살해당했어."

"질문이 하나 아니 두 개 있습니다."

석범이 화면 속 꽃송이들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공범이라면 셋은 서로 알았을까요? 박말동은 먼저 죽었으니 논외로 치더라도, 시정희와 변주민은 그룹 상담 때 만나지 않았습니까?"

"가상공간에서 작당하여 도둑질을 하거나 폭행을 퍼붓는 자들이라도 오프라인에선 일면식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지. 사이트 로그 파일을 따라 추적해 들어가도, 같은 마을이나 같은 도시가 아니라 전 세계로 뿔뿔이 흩어져 있어 추적이 어렵거든. 몰랐을 가능성이 90퍼센트 이상이야."

"또 하난 그들이 모인 게 필연이라면, 누가 그들을 모았죠?"

"흠, 복잡한 문제야. 가장 쉬운 용의자는 노윤상 원장이겠지. 노 원장은 보안청을 통해 넘어온 환자 관리와 치료 일정을 정할 권한이 있으니까. 하지만 내가 노 원장이라면 이런 짓은 안 해. 너무 빤히 드러나니까."

"검사님 말씀은 또 다른 누군가가 그들을 불러 모았을 가능성도 있다는 겁니까?"

"오늘은 이 정도 해두자고. 더 이야길 해봤자 물증 없는 추측일 뿐야. 남 형사! 우선 이 자료를 보안처리해서 노 원장에게 보내줘."

"노 원장에게요? 왜죠? 아무리 기브앤테이크라고 해도, 이건 극비 자료고 노 원장은 유력한 용의잡니다."

"그러니까 넘겨주라는 거야. 노 원장의 반응을 보자고. 그는 아직도 많은 걸 감추고 있어. 우린 그걸 알아내야 해. 월척을 낚으려면 미끼부터 던져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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