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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9년 2월 16일 02시 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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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대통령은 취임 초인 지난해 3월 경제인 102명에게 자신의 휴대전화 번호를 알려주며 “언제든지 전화를 받겠다”고 밝혔다. 경제를 살리기 위해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건의를 받아들이겠다는 선언이었다. 이 대통령의 휴대전화엔 이들의 전화번호가 입력돼 있어 전화가 걸려오면 발신자의 이름이 뜬다.
그 후 이 대통령의 휴대전화엔 더 많은 기업인과 정치인, 측근 등의 연락처가 입력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중엔 이 대통령이 단축번호를 눌러 통화할 수 있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그는 시장에서 만난 할머니 등에겐 비서관의 전화번호를 알려줬다.
하지만 취임 1주년을 앞둔 지금 이 대통령에게 전화로 민심을 전하는 인사는 그리 많지 않다는 말이 나돈다.
기업인 중에선 지난해 12월 17일 김기문 중소기업중앙회장이 전화한 게 마지막이라고 한다. 이 대통령은 전화를 받고 서울 마포의 한 돼지갈비 집에서 열린 중소기업단체장 송년회에 참석해 격려했다.
사실 대통령에게 불쑥 전화를 거는 건 간단한 일이 아니다. 대통령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몰라 망설여지고, 오히려 대통령이 전화를 해주면 고맙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정치권에선 한나라당 지도부가 현안이 있을 때 가끔 통화할 뿐 이 대통령의 통화 대상은 주로 몇몇 측근에 국한된 것 같다는 이야기가 많다. 여권의 화합을 위해 협력해야 할 박근혜 전 대표와도 통화하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얼마 전 민주당의 한 고위당직자에게서 “대통령이 가끔 전화를 해서 국정현안을 놓고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교환하면 좋을 것 같은데 그런 일이 없다”는 말을 들었다. 청와대의 한 핵심 관계자는 “주요 법안에 대한 야당의 생각이 많이 다르다는 걸 안 뒤로는 대통령이 야당 지도자들과 통화하지 않는 것 같다”고 전했다.
어쩌면 이 대통령은 국정을 챙기느라 전화로 여론을 수렴할 시간이 없을지도 모른다. 부지런히 민생현장을 돌아다니기 때문에 굳이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국민과의 소통이 미흡했다는 평가가 적지 않은 만큼 혹시 초심을 잃지 않았는지 돌아보면 어떨까 한다.
전화나 서신 같은 사적이고 비공식적인 소통수단이 형식을 갖춘 회동보다 진솔한 대화에 효과적이라는 건 상식이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공화당 인사들에게 전화로 협조를 요청하는 것을 보라.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전 일본총리는 생전에 이른바 ‘오부치폰’으로 지지율을 2배나 끌어올린 일도 있다.
9일 공개된 조선 제22대 왕 정조(1752∼1800)의 어찰(御札) 299점을 봐도 그렇다. 정조는 정적으로 알려진 노론 벽파의 거두 심환지에게 때론 하루에 네 통이나 서한을 보내 막후에서 국정을 조율했다. 두 사람이 서한 정치를 통해 마치 각본에 따른 연기를 하듯 정국을 풀어간 것은 감탄을 자아낸다. 반대파와 겉으론 대립해도 막후에선 소통이 있었기에 정조는 개혁정책을 추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대통령은 요즘 경제위기를 앞장서 극복하느라 애쓰고 있다. 그와 관련해 비판세력과도 막후 접촉과 설득에 힘쓴다면 더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열린 마음으로 나라를 살리려는 대통령의 그런 노력을 과거의 잣대로 ‘공작 정치’라고 폄훼할 이유는 없다.
한기흥 정치부장 eligiu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