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창혁]오래된 미래

  • 입력 2009년 2월 6일 02시 58분


마스카와 도시히데(益川敏英) 일본 교토대 명예교수의 인터뷰(동아일보 2월 4일자 A3면)는 한마디로 ‘야코죽이는’ 글이었다. 서양인의 콧대가 낮아졌다는 쌍팔년도 시쳇말이지만, 기분이 꼭 그랬다. 37년 전인 1972년 한 달 만에 완성한 A4 용지 6쪽짜리 논문으로 2008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는 신화(神話) 같은 얘기 때문만은 아니다. 앞으로의 계획을 묻는 특파원의 질문에 그는 “거리(distance)의 기원을 밝혀보려 한다”고 했다. 무슨 말인지 언뜻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만 시공(時空)을 뛰어넘는 듯한 그의 호기심과 동경(憧憬)에 정말 야코가 죽고 말았다.

더는 구체적인 설명이 없었다. “처음부터 거리가 생겨난 게 아니라는 말을 하더라”는 특파원의 취재 후기를 들어보면 아마도 우주 생성과 거리의 기원에 관한 연구가 아닌가 짐작할 뿐이다. 태초에 우주는 거리가 없는 하나의 점이었고, 빅뱅과 함께 거리가 생겨난 것이므로…. 아직 68세이니 그는 앞으로도 한 10년은 더 후학을 양성할 것이고, 일본은 끊임없이 제2, 제3의 마스카와를 만들어낼 것이다.

하필이면 인터뷰가 실리던 날 이배용 이화여대 총장에게서 세종대왕 좌상(坐像) 얘기를 들었다. 사학자인 이 총장은 1년 전부터 ‘광화문광장 세종대왕 동상 설립’ 프로젝트의 숨은 설계자로 동분서주해 왔다. 말도 많았다고 한다. 임금의 동상은 경복궁 안에 세워야 하는 것 아니냐는 주장도 있었고, 임금 앞에 무장(武將·이순신 장군)이 버티고 서 있어선 안 된다는 고담준론(?)도 있었다고 한다. 할아버지(태조), 아버지(태종)도 동상이 없는데 집안에 자식의 동상을 세우면 효(孝)에 맞겠느냐는 말로 갑론을박을 잠재웠지만 이 총장은 아직도 입맛이 쓰다는 표정이었다.

내 입맛은 더 썼다. 세종대왕 좌상 설립은 광화문을 국가상징 거리로 조성한다는 프로젝트 중에서도 가장 상징적인 사업이다. 국가상징으로 부활하는 대왕 세종에게서 어떤 미래를 읽어낼 것인가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것이다. 각론을 놓고 왈가왈부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KBS TV 드라마 ‘대왕 세종’이 그려내려 한 것처럼 세종이 우리의 ‘오래된 미래’라는 사실엔 모두 동의할 수 있지 않을까.

37년 전 마스카와 교수의 논문도 후학들에겐 ‘오래된 미래’였다. 그는 “지금 노벨상 수상작도 모두 20∼30년 전의 연구 성과 아닌가”라고 물었다. 그가 논문을 발표한 뒤 20여 년간 수백 명의 물리학자가 증명에 매달렸고, 수백억 엔이 들어갔다.

세종이 오늘 우리에게 던지고 있는 정말 오래된 미래는 논문으로 치면 수백 편은 될 것이다. 세종이 남긴 오래된 미래로 노벨상을 만들고 못 만들고는 오늘 우리의 몫이다.

서울시는 조만간 좌상을 제작할 작가가 선정되면 그의 책임 아래 한글, 과학, 군사, 음악에서부터 세종의 ‘노비출산휴가제’까지 다방면의 위업을 스토리텔링 형식으로 보여주겠다고 한다. 이 총장도 그때를 기다리며 ‘오래된 미래―세종의 12가지 이야기’를 준비 중이라고 귀띔했다. 벌써부터 사뭇 기다려진다. 세종 좌상이 오늘 우리가 후생(後生)들을 위해 ‘오래된 미래’를 준비하는 의지의 푯대가 되길 빌고 또 빈다.

김창혁 교육생활부장 c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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