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황형준]시위에 묻혀버린 제야의 종소리

  • 입력 2009년 1월 2일 02시 59분


기축년 새해가 시작되던 1일 0시경 서울 종로구 보신각.

한 70대 노인은 “매년 보신각 타종을 보러 왔는데 새해 벽두부터 시위대가 점거를 하고 소란을 피우는 것은 처음 본다”며 “정치적 이념과 상관없이 오늘 같은 날 촛불 같은 걸로 대치해야겠느냐”면서 안타까워했다.

경제위기로 어려웠던 한 해를 정리하고 희망에 찬 새해를 맞이하는 ‘제야의 종’ 타종 행사가 열린 이날 보신각 일대에는 8만여 명의 인파가 몰렸다. 그러나 4000여 명의 시위대로 인해 타종 행사인지 집회 현장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다함께, 전대협, 아고라 등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시위를 주도했던 단체들의 깃발 수십 개가 휘날리는 데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에서 나눠준 ‘우리 선생님을 돌려주세요’라는 글이 적힌 노란 풍선 5000여 개, 전국언론노동조합이 나눠준 피켓들이 시민들의 손에 들려 있었다.

시위대는 촛불을 들고 “이명박은 물러나라” 등의 구호를 외쳤고 새해를 알리는 종이 울리자 대통령을 비난하는 문구를 적은 기구들을 하늘에 띄웠다. 수십 개의 기구는 폭죽과 함께 불빛을 뿜어내며 하늘로 올라갔지만 새해 소망이 아닌 정치적 이념과 구호만 담겨 있는 것 같았다.

타종이 끝나고 오세훈 서울시장의 인사말이 시작되자 일부 시위대는 “닥쳐라” “꺼져라” 등의 원색적인 야유를 보내기도 했다.

행사에 참석하려던 일부 시민들은 길목을 막은 경찰, 시위대와 경찰의 몸싸움 등으로 곳곳에서 길이 막히자 하는 수 없이 발길을 돌려야 했다. 타종 행사를 구경하러 나온 40대 김모 씨는 “온 나라를 시끄럽게 했던 촛불이 한 해의 마지막 날까지 혼란스럽게 만들었다”며 서둘러 현장을 떠났다.

경찰 관계자는 “올해는 15만 명이 모일 것으로 예상했는데 그보다 인파가 많이 적었다”며 “추운 날씨와 시위대 때문에 많은 시민이 그냥 집으로 돌아간 것 같다”고 말했다.

지난해 12월 31일 오후 5시경부터 현장에 출동한 1만5000여 명의 젊은 전·의경들과 경찰관들도 추위에 떨며 새해를 맞아야 했다.

2008년 여름 내내 서울 청계광장 등 시민의 공간을 빼앗았던 촛불 시위대. 이들은 송구영신의 날 시민들의 경건한 타종 행사마저 정치 구호가 난무하는 시위의 장(場)으로 만들어버렸다. 즐겁게 새해를 맞을 시민의 작은 소망마저 빼앗은 것이다.

황형준 사회부 constant2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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