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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8년 10월 3일 19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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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발적 확대 재생산이 비극 불러
1996년 ‘저널 오브 커뮤니케이션’이 특집호를 통해 ‘인터넷은 매스미디어다’라고 선언한 지 10여 년이 흘렀다. 그동안 수많은 연구자는 인터넷의 가능성에 열광해 왔다. 상호작용성 멀티미디어 하이퍼링크 등 상상하지 못했던 일을 눈앞에 보여주는데 이를 거부하기란 쉽지 않았다.
미디어가 제공하는 상품을 소비하기만 해 온 일개 소비자가 감히 만인을 상대로 자신의 이야기를 내놓을 수 있게 되자 곧바로 민주주의의 부활이라 지칭했다. 정치문제에서부터 연예계의 시시껄렁한 소문에까지 참여라는 명분으로 간섭하는 행위를 자아의 새로운 발견으로 설명했다. 그렇게 10여 년 세월이 지난 지금 우리는, 그처럼 놀라워했던 것이 단지 테크놀로지일 뿐이며, 배후에 도사린 인간의 사악함에 테크놀로지가 교묘하게 악용되고 있음을 확인하고 있다.
인터넷 기술의 핵심은 연결이며 그 주체와 대상은 인간이다. 참여는 인간 사이의 연결의 한 현상이다. 엘리트집단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근대적인 지성의 생산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창출되는 집단지성도 인터넷의 연결 때문에 가능하다. 누구도 모든 것을 알지 못하지만, 누구나 뭔가는 알기 때문에 모두가 자기 가진 것을 한데 모으고 조합해 조각을 하나로 맞추어 낼 수 있는데 인터넷이 이를 만들어 낸다. 적어도 새로운 인식을 생산하는 인터넷의 이 새로운 메커니즘을 발견한 것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악플의 인터넷 테러는 민주주의라고만 이해해 온 인터넷의 연결과 참여가 또 다른 얼굴을 갖고 있음을 드러냈다. 악플의 원생산자는 쓰기행위를 통해 자신의 의지를 주장하는 자이다. 문제의 본질적 책임은 당연히 그에게 있다. 악플의 심각성은 2차 생산에 의해 더욱 커진다는 데 있다. 엄청난 속도와 양으로 악플을 폭발적으로 확대 재생산해 유통하는 지속적이고 진화적인 메커니즘 역시 참여라는 이름으로 행해진다. 최진실의 비참한 사례에서 분명하게 확인된다.
‘사이버 모욕죄’만으로 효과 없다
촛불에 대한 정선희의 언급에 붙은 악플은 안재환의 사업으로 확대 재생산되어 유포되더니 급기야 최진실로 이어졌다. 최진실의 비극은 악플 자체를 넘어서서 이것이 바이러스처럼 번지면서 블랙홀 같은 폭발적 위험성을 갖는 재생산에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괴담을 실어 나르는 악플은 개인의 차원이 아니라 사회적 차원으로 얼마든지 확대될 수 있는 것이다.
악플의 원생산자는 생산적 참여로서 작정하고 쓰기 때문에 당연히 책임지겠다는 의사를 표시했다고 볼 수 있고 또 직접 책임을 물을 수 있다. 하지만 집단으로 이뤄지는 소비적 참여인 확대 재생산은 비겁하게 익명성의 바다로 숨어버리기 때문에 따져 들기 어렵다. 이런 참여는 결코 민주주의가 아닐 뿐만 아니라 집단범죄나 마찬가지다.
정부가 사이버 모욕죄의 신설을 검토하고 있지만 악플의 원생산자에 대한 처벌에 그칠 수밖에 없다. 일부 누리꾼의 수준에서 일어날 수 있지만 범사회적 수준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악플의 2차적 생산, 확대 재생산, 유포 및 소비는 책임을 물을 길도 막막하고, 섣불리 그러려고 해서도 안 되는 난감한 문제이다.
더욱이 책임을 묻는 일은 사후약방문이다. 악플의 유통로인 플랫폼, 특히 포털에 악플에 대한 강력한 조치를 요구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포털이 여러 가지 기술적, 비즈니스적 어려움을 안고 있지만 어떻게 하든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말했듯이 콘텐츠의 생산에서부터 단순한 소비나 유포에 이르는 다양한 수준으로 형성되는 참여의 멱함수적 현상에 주목하면 악플 통제의 해답을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인터넷 참여는 인간의 연결로 이루어진다. 작금 인터넷에서 벌어지는 일은 테크놀로지가 아니라 인간이 세상의 주역임을 보여준다.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그렇다. 인간의 얼굴을 한 인터넷, 인터넷 휴머니즘을 기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사승 숭실대 언론홍보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