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정미경]여성친화제도의 ‘함정’

  • 입력 2008년 6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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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여) 씨가 다니는 회사는 ‘여성을 위한 회사’로 통한다. 가사와 육아 문제로 고민하는 여성을 위해 다양한 휴직 제도를 운영하고 있고, 스스로 근무 시간과 강도를 탄력적으로 조정할 수 있으니 주변의 부러움을 살 만도 하다.

A 씨는 올해 초 자녀를 출산한 데다 시어머니 간호까지 해야 한다. 친구들은 회사 복지제도를 이용해 보라고 권하지만 그는 야근도 잦은 풀타임 업무를 고집한다.

“조직 내 경쟁에서 밀리고 싶지 않습니다. 휴직을 하거나 좀 더 수월한 업무로 전환하면 승진이나 인사고과에서 불이익을 받을 가능성이 큰데 어떻게 그런 제도를 이용하겠어요.”

치열한 경쟁을 뚫고 입사해 조직 내에서 인정받는 자리에 오르려는 수많은 여성에게 A 씨의 고민은 남 얘기 같지 않다.

많은 연구 결과가 여성친화적 근무환경이 인재 유치, 생산성 향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 능력 있는 여성을 불러 모으고 근무 사기를 북돋우는 데 이런 제도가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성이 조직 내에서 결정권이 있는 자리에 오르는 단계가 되면 여성친화제도를 바라보는 시각은 달라진다. 제도는 있지만 제도를 실제로 이용할 경우 경력관리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이를 여성친화제도의 ‘딜레마’ 또는 ‘함정’이라고 한다. 여성의 사회활동을 돕기 위한 제도가 결과적으로 여성의 고위직 진출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은 노동부 산하에 ‘유리천장(조직 내 여성의 고위직 승진을 가로막는 보이지 않는 벽) 위원회(GCC)’를 만들어 여성친화제도가 여성의 경력관리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해 심층 연구를 했다.

GCC는 이런 제도가 여성의 초기 사회 진출을 돕지만 승진 단계가 되면 갈등관계를 조성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미국 500대 기업 인사담당자의 45%는 여성친화제도가 여성의 경력관리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답했다. 미국 대기업 여성 간부의 63%는 휴직이나 업무조정 제도를 이용해본 적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남녀 고용평등 정책이 발달한 스웨덴에서도 육아휴직 제도가 오히려 여성의 승진 가능성을 감소시킨다는 경제학자 린다 하스의 연구 결과가 있다. 유럽에서는 여성친화제도가 여성으로 하여금 고위직 경쟁을 포기하고 사기업보다 경쟁이 덜 치열한 공공 부문을 선택하게 한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국내에서 직원 500명 이상을 둔 기업의 70%가 여성친화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육아휴직, 배우자 출산휴가, 유산휴가, 근무시간 단축, 저강도 업무배치 등 종류도 다양하다.

그러나 막상 제도 이용률은 저조하다. 지난해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국내 직장여성 5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77%가 여성친화제도를 이용한 적이 없고 이용할 계획도 없다고 답했다. 여성을 배려하는 제도가 ‘유리천장’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여성 스스로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인력 활용을 위해 여성친화제도는 필요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회적 약자 배려정책이 그러하듯 여성친화제도 역시 일정 단계를 넘어서면 여성의 사회적 성취를 가로막는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 있다.

지금까지 우리 사회가 제도를 확대하는 데 치중해 왔다면 이제부터는 제도의 효율성을 높이고 부작용을 줄이는 방안을 고민해야 할 때다. 여성을 위한 제도도 그중 하나다.

정미경 교육생활부 차장 mick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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