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낙인의 법과 사회]경무대行과 청와대行의 차이

  • 입력 2008년 6월 3일 02시 55분


1960년 4월,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며 경무대(지금의 청와대)로 돌진하던 청년학도들의 꽃다운 청춘은 경찰의 총구 앞에 이슬처럼 스러졌다. 1987년 6월, 시민과 학생들이 어우러진 호헌철폐는 직선쟁취로 이어졌다. 권위주의의 질곡으로부터 민주회복을 열망하는 시민들에게 실정법은 거추장스러운 장식물에 불과했다. 비록 국가와 사회의 완전한 변혁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4·19와 6월민주항쟁은 현대사에서 혁명으로 자리매김한다.

혁명은 기존 체제를 넘어 새 시대를 알리는 ‘미래의 전달자(porteur d'avenir)’이다. 전체 국민의 환호와 함께하는 혁명의 정당성은 극소수 반란세력이 도모하는 쿠데타(coup d'´Etat)와 구분된다. 새로운 법이념을 고취시키는 혁명은 주어진 법에 기초한 법치주의의 틀을 뛰어넘어 폭군방벌(放伐)론적 민주주의를 정당화한다. 혁명이 진행되는 동안에 실정법은 사실의 규범력에 자리를 내줘야 한다. 오로지 정의의 칼만 통용될 뿐이다.

20년을 뛰어넘어 2008년 5월 시작된 촛불문화제는 6월의 촛불시위로 이어지면서 이제 겨우 출범 100일을 맞는 권력의 심장부를 향하고 있다. 정권 타도, 대통령 탄핵과 같은 거친 언어가 난무해도 성난 민심의 과장된 표현법으로 받아들인다. 어느새 촛불시위는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가 넘쳐나는 시민축제의 현장으로 진화한다. 집시법을 무시하고 수도 서울의 한복판에 교통대란이 일어나도 민주주의의 생명선인 표현의 자유를 우선 보장한다. 남녀노소 각계각층의 자발적 참여는 열린 소통의 공간으로 자리 잡는다. 특정 세력에 좌우되지 않는 성숙한 시민의식은 절제와 금도를 지켜왔다.

하지만 깊은 밤 촛불시위 행렬의 청와대행은 결국 공권력과의 충돌을 야기하고 만다. 성난 군중은 경찰의 물대포에 저항한다. 시위대는 경찰이 이명박 정권의 앞잡이라고 비난한다. 왜 민주시민의 앞길을 가로막느냐고 항의한다. 하지만 경찰이 심야의 청와대행진을 수수방관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럼 청와대 앞에서 어쩌자는 것인가. 이 지경에 이르도록 대통령과 정부여당은 속수무책이다.

한밤중 대치하는 경찰과 시위대 모두 민주시민이다. 다만 주어진 현실이 그들을 창과 방패로 구분하고 있을 뿐이다. 젊은 그들의 우발적 충돌은 또 다른 불행을 야기할지도 모른다. 이제 시위대도 민주화 과정에서 권력의 앞잡이로만 치부하던 경찰로 보아서는 안 된다. 경찰은 대한민국 공권력과 법치의 상징이다. 혁명의 시대에 경찰은 공공의 적이지만, 민주의 시대에는 공공의 수호천사라야 한다.

1960년 4월의 경무대행과 2008년 6월의 청와대행을 분명히 가릴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경무대행은 헌법과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장엄한 의전행사였다. 하지만 지금의 청와대행은 혁명 전야의 행진이 아니다. 청와대행은 대통령을 향한 국민적 열정의 가장 적극적인 표현일 뿐이다.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법치주의를 통째로 무시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이제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조화롭게 발전시키는 선진 시민사회가 뿌리내려야 한다. 민주주의의 성전에 불을 지피던 그 시대의 시위와 능동적 시민의 참여로 이뤄낸 축제적 시위의 차별적 인식이 전제돼야 한다.

촛불시위의 제1구호는 대한민국 헌법 제1조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대한국민이 이 나라의 주인이다. 주인은 주인답게 행세해야 한다. 주인의 품격이 머슴의 행실을 좌우한다. 권력을 수탁 받은 머슴들도 주인을 제대로 섬겨야 한다. 머슴이 주인 노릇하려 들면 국기(國基)가 송두리째 뒤흔들린다. 말로만 낮은 자세로 섬기지 말고 진심을 보여야 한다.

성낙인 서울대 교수·헌법학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