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홍권희]기업 없는 ‘기업도시’

  • 입력 2008년 5월 13일 02시 59분


태반이 군사보호구역으로 묶여 있던 ‘시골도시’ 경기 파주시는 2003년 초 LG필립스LCD 공장을 유치한 뒤 첨단 산업도시로 다시 태어났다. 포도밭이던 충남 아산시 탕정마을은 삼성LCD 공장이 들어서면서 기업도시가 됐다. 충남 당진읍내 풍경은 다른 마을이나 똑같지만 자동차로 10분만 달리면 쭉 뻗은 4차로 옆의 고층아파트와 상가들이 눈에 들어온다. 2004년 현대제철이 부도난 한보철강을 인수해 정상화시키자 도시 전체가 달라지고 있다. 기업이 도시 외관은 물론이고 시민의 삶까지 통째로 바꾼 사례들이다.

▷‘세계 최고의 기업도시’라는 핀란드 오울루는 수도 헬싱키에서 500km 떨어진 인구 13만 명의 소도시다. 휴대전화 세계시장 점유율 1위인 노키아의 중앙연구소가 이곳에 자리 잡자 소니, 캐논 같은 글로벌 기업과 협력업체들이 줄줄이 입주했다. 인구의 절반이 넘는 7만 명이 크고 작은 기업에서 일한다. 오울루 시 산하의 기업 지원기구 직원들은 “기업이 필요로 하는 것을 해주는 것이 우리의 임무”라고 서슴없이 말한다.

▷미국의 실리콘밸리, 일본의 도요타도 전형적인 기업도시다. 스웨덴의 시스타 사이언스 시티도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기업도시다. 2004년 이규황 전국경제인연합회 전무는 이런 기업도시를 한국에 도입해 보자고 정부에 제안했다. 국가 간 경쟁이 지역 간, 도시 간 경쟁으로 확산되고 있으므로 산업클러스터(집적단지)를 형성해 차세대 성장동력이 될 수 있는 기업도시를 키우자는 것이었다. 전국균형발전정책을 추진하던 정부가 이를 받아들여 2005년에 관련법을 만들었다.

▷정부가 지정한 기업도시 6곳 중 태안만 작년에 착공했고 충주와 원주는 실시계획 승인만 받은 상태다. 기업의 시각이 아니라 정부의 시각에서 추진한 것이 결정적인 문제다. 요즘 ‘관제(官製) 기업도시’들은 “기업 유치가 힘들다”고 하소연하지만 파주는 기업도시로 지정받지 않고도 기업도시가 됐다. 유화선 파주시장은 다른 기업도시가 부진한 데 대해 “좋은 기업을 유치하려는 절실한 마음이 부족한 탓”이라고 말했다. 전경련은 “미흡한 기반시설과 규제로 투자매력이 떨어진다”고 지적했다. 정부가 주도하는 이름뿐인 기업도시에는 기업이 눈길을 보내지 않는다.

홍권희 논설위원 koni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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