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국양]봄꽃을 닮았던 어머니

  • 입력 2008년 5월 8일 03시 00분


관악산의 봄은 낮은 계곡에서부터 시작하여 산봉우리로 올라간다. 계곡 안의 활엽수는 초겨울에 잎을 잃고 앙상한 가지만 남은 채 지내다 4월이 되면 연녹색 어린잎을 내밀기 시작한다. 활엽수 사이사이에 관목들이 있는데 낮은 계곡에는 개나리가, 좀 높은 계곡에는 분홍 진달래가 고개를 내밀며 봄을 알려준다. 진달래꽃이 시들고 잎이 날 무렵 흰색과 붉은색의 철쭉이 계곡 곳곳에 고운 빛깔을 더한다. 능선을 덮고 있는 침엽수들도 5월이 되면 칙칙한 암녹색을 벗고 진녹색으로 갈아입는다.

식물들은 이렇듯 짧게는 수십 년 길게는 천 년을 봄마다 새 꽃과 잎으로 다시 태어난다. 그러나 이런 식물과 달리 사람을 포함한 모든 동물은 단 한 번 태어나 자라고 늙고 죽은 뒤 단순한 유기물과 무기물 분자로 분해되어 자연으로 돌아간다.

이러한 자연의 순리를 따라 작년 봄 어머니를 하늘나라로 보내드렸다. 석 달 반을 앓다 돌아가셨지만, 지금 기억엔 편찮으실 때 얼굴보다 누렇게 바랜 흑백 사진 속의 젊은 날 예쁜 어머니의 모습만 생생하다. 누구나 때가 되면 죽는다는 걸 모르는 건 아닌데, 그래도 내 어머니는 돌아가시지 않을 것 같은 착각을 했었다. 돌아가시기 몇 달 전부터는 지레 겁먹은 마음과 조바심에 어떤 밤에는 돌아가시는 꿈을 미리 꾸며 꿈속에서 서럽게 울다 벌떡 일어나 안절부절못했던 기억이 난다. 어머니의 따뜻한 손을 만질 수 없다는 생각은 내가 어머니의 뒤를 따라가는 날까지 허전함으로 항상 내 맘에 남아 있을 것 같다.

행복했던 봄나들이의 기억

어머니는 유난히 진달래, 철쭉, 영산홍, 벚꽃, 장미와 같은 봄꽃들을 좋아하셨다. 작년 봄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봄꽃들을 꼭 보여드리고 싶어, 돌아가시기 반 달 전 병원의 허락을 받아 불편하신 어머니를 휠체어에 모시고 가까운 아차산으로 봄나들이를 갔었다. 날이 꽤 쌀쌀했어도 마다하지 않고, 내내 밝은 표정을 지으셨다. 몸이 불편하여 귀찮기도 하셨겠지만 자식이 행복해하는 걸 보고 즐거우셨던 것 같다. 아니면 항상 그랬던 것처럼 본인보다는 자식을 위하여 밝은 모습을 내 기억에 남겨 주려 작정하셨거나.

아들딸을 여럿 낳으셨어도 막둥이인 나를 특별히 사랑하셨다. 어렸을 때는 다른 형제들이 시기할 만큼 내게 여러 가지 특혜를 주셨는데, 그중 하나가 외출하시는 어머니를 따라갈 수 있는 권리였다. 초등학교 2, 3학년 때까지 동네 여탕에 따라가는 건 물론 시장에도 자주 데리고 다니셨다. 남대문시장은 멀기는 하여도, 볼거리가 많고 올 때는 군것질거리를 사주시곤 하여 꼭 따라가고 싶었던 곳이었다.

그러나 항상 즐거운 기억만 있는 것은 아니어서, 명절 전에 남대문시장에 가서 살거리가 많은 경우 숭례문 쪽 시장 어귀의 생선가게에 나를 맡기고 시장을 보셨다. 그렇지 않아도 형들이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고 놀려서 기연가미연가했는데 시장 안으로 사라지신 어머니가 한두 시간 동안 돌아오지 않으면, 이젠 나를 버리신 것이라고 단정하고는 울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에드윈 허블이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는 팽창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후, 이제 과학자들은 우주의 생성과 전개에 대해 잘 알게 되었다. 우주의 질서 중에는 거울을 보고 있을 때 거울 속 물체들과 거울 밖 물체들이 좌우만 바뀌었을 뿐 똑같다는 논리를 닮은 공간적 대칭성이라는 것이 있다. 그러나 공간과 달리 시간은 대칭성이 없어, 한쪽 방향으로는 진행하지만 거꾸로 진행하지는 않는다. 즉 우리가 사는 우주에서는 137억 년 전 빅뱅에 의하여 생성된 후 시간은 한쪽 방향으로만 흐르고 있다. 만약 우리가 모르는 다른 우주가 있어 빅뱅 후 시간이 거꾸로 흐른다면 거기서는 어머니를 다시 만날 수도 있으련만 하는 비과학적인 상상을 해본다.

꽃 키우며 그리움 달래리라

얼마 전 토요일 시장을 지나다 작은 화분에 심어진 분홍색과 노란색 몽우리가 피어나는 장미 두 그루를 사왔다. 아파트 베란다에 놓고 아침 출근 전 햇빛이 잘 드는 쪽으로 옮겨주고, 물도 자주 주니 꽃이 활짝 피어났다. 다년생인 이놈들을 큰 화분에 옮겨 심고 잘 키워봐야겠다. 아니면 내친김에 베란다에 긴 화단을 만들어 놓고 어머니가 좋아하시던 꽃들로 가득 채우면 어떨까 한다.

국양 서울대 연구처장·물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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