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허영]법의 지배와 사람의 지배

  • 입력 2008년 4월 25일 02시 57분


오늘은 법(法)의 날이다. 법의 날에 법을 다시 생각하게 되는 것은 우리 법문화가 너무나 후진적이기 때문이다. 법은 과연 무엇일까.

법학과를 지원하는 대학 수험생에게 법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거의가 법은 도덕과 달라서 강제력이 그 본질이라고 대답한다. 고등학교에서 법과 도덕의 차이에 관하여 배운 것을 떠올린 답이다. 강제력이 법의 본질이라면 상식에 어긋난 법도 강제력으로 실현해야 옳으냐고 되물으면 당연히 그렇다는 답이 되돌아온다.

우리 국민의 평균적인 법의식도 이런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분쟁을 법적으로 해결하는 것을 몰인정하고 불쾌하게 생각한다든지, 법은 권위적이고 편파적이라고 느끼는 국민이 많다는 통계가 있다. 우리의 법문화가 후진적인 이유는 이처럼 사람들의 법의식이 혼란스럽다는 데 있다.

강제력은 결코 법의 본질은 아니다. 강제력은 법을 실현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인간사회에 법이 필요한 이유는 사회평화를 위해서다. 모든 사람이 추구하는 자유와 평등과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 사회평화를 유지하는 최선의 길이므로, 자유와 평등과 정의를 보장하는 것이 바로 법이다. 따라서 자유와 평등과 정의 같은 보편적인 가치가 법의 본질이고 법의 영혼이다. 법은 바로 상식이다. 법에 강제력이 주어지는 이유는 법의 이 본질적인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다.

‘법의 본질=강제력’ 인식은 잘못

우리의 법문화가 후진적인 것은 법의 본질과 수단을 혼동하는 잘못된 인식 때문이다. 그래서 무엇이든지 법의 가면만 씌워 법률로 공포하면 법이 되고 강제력으로 관철할 수 있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라틴어가 말해 주듯 법(jus)과 법률(lex)은 엄연히 다르다. 법의 영혼이 빠진 것은 법이 아닌 법률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 국회와 정부는 법을 만들 때 법의 본질은 외면한 채 법을 정치의 시녀쯤으로 착각하는 법률만능주의 경향이 강하다. 그 결과 법의 가면을 쓰고 등장하는 사이비 법(=법률) 내지는 정치만이 난무할 뿐 자유와 평등과 정의의 실현은 요원한 이상에 머문다.

사람의 지배가 아닌 법의 지배를 추구하는 인류의 꾸준한 노력은 법의 지배만이 인류에게 평화와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사람의 지배는 권력의 집중을 낳고, 권력 집중은 필연적으로 권력 남용과 악용을 불러와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억압한다.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위협하는 권력 집중을 막지 않고서는 법의 지배도 허상일 수 있다는 인식이 마침내 법을 만드는 기관과 법을 집행하고 적용하는 기관을 분리하는 원칙을 탄생시킨 것이다. 삼권분립은 법의 지배가 법의 탈을 쓴 사람의 지배로 둔갑하는 것을 막기 위한 예방수단이다. 어느 누구도 자기 자신의 심판관 노릇을 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삼권분립은 외형상의 형식에 그치고 정당을 통한 권력융화 현상으로 입법부와 행정부의 상호 견제기능은 사실상 찾아보기 어렵다. 여당은 행정부의 대리인 노릇을 당연한 것으로 착각하고, 야당은 사사건건 정부 여당에 반대하는 것을 능사로 삼는 정치풍토 속에서 진정한 법문화는 실종 상태다.

여당은 정부의 대리인 노릇이 아닌 비판적인 협조자의 자세로 정부와 함께 법의 실현에 노력하고, 야당은 비판을 위한 비판, 반대를 위한 반대의 구태를 버리고 당리당략이 아닌 국민의 자유와 평등과 정의를 위한 투사로 탈바꿈할 때 우리의 법문화는 비로소 선진대열에 합류하게 될 것이다.

법의 날, 法治제자리찾기 다짐을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도 사람의 사람에 대한 지배는 불가피하다. 이 지배를 가능케 하는 힘의 원천은 주권자인 국민이다. 국민이 부여한 힘은 국민을 위한 것이지 통치자를 위한 것은 아니다. 모든 통치기관은 힘의 행사에서 언제나 법의 본질과 권력분립의 참뜻을 되새겨 국민의 자유와 평등과 정의를 실현하는 선진적인 법치문화를 확립하는 데 노력해야 한다. 그래서 법이 정치의 시녀가 되는 일도, 법의 영혼이 빠진 법률이 양산되는 일도 더는 없어야 한다. 그래야만 국민도 분쟁을 법적으로 해결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법을 지키는 일을 생활화하게 될 것이다.

허영 헌법재판연구소 이사장·전 연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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