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이순원]이웃사촌이 경찰보다 훨씬 낫다

  • 입력 2008년 4월 9일 02시 58분


얼마 전 경기 안양시에서 혜진이와 예슬이가 이웃에 사는 성폭행 범죄자에게 납치돼 끔찍하게 살해됐다. 그 사건이 채 정리되기도 전에 내가 사는 경기 고양시 일산에서 다시 초등학생 성폭행 미수사건이 발생했다.

모자를 푹 눌러 쓴 40대 남자가 엘리베이터 안까지 따라와 어린 초등학생을 밖으로 끌어내려고 했다. 아이는 죽을힘을 다해 저항했고, 남자는 그래도 아이를 끌고 가려고 흉기로 위협하고 또 발길과 주먹으로 무차별 폭행했다. 아이가 살려달라고 비명을 지르는 소리를 들은 이웃집 여대생이 용기를 내어 나서지 않았다면 낯선 남자는 힘으로 어린 여자아이를 자기가 원하는 곳으로 끌고 갔을 것이다.

사건의 전말이 알려졌을 때 시민들이 분개한 것은 아직 신원을 알 수 없는 가해자에 대해서보다는 먼저 경찰에 대해서였다. 누가 봐도 어린아이를 성폭행하려다가 여대생이 나서는 바람에 실패해 달아난 사건인데도 경찰은 그것을 단순폭행 사건으로 얼버무리려 했다.

얼핏 보기엔 사건을 단순 축소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이것은 경찰이 앞장서 어린아이를 대상으로 한 이런 범죄가 계속 일어나도록 조장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누가 보더라도 어린이 성폭행 미수사건을 경찰이 먼저 나서 그것은 성폭행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그냥 단순폭행일 뿐이라고 오히려 범죄자 편을 들어 변명까지 해주는 판인데 왜 유사 범죄가 기승을 부리지 않겠는가.

시민의 안녕을 지켜야 할 경찰까지 이 모양이니 아이를 학교와 학원에 보내는 것도 걱정스럽고, 혼자 엘리베이터를 타게 하는 것도 여간 불안하지 않다. 이런 일이 세상에 알려질 때마다 어린아이들과 남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힘이 약한 여자들은 혼자 길을 가는 것도, 혼자 차를 타는 것도 무섭고 두려울 수밖에 없다. 어제까지 복도에서 만나면 인사했던 이웃집 아저씨도 저절로 경계할 만큼 몸도 마음도 움츠러드는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흉악범죄 앞에 고스란히 노출돼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학생이 한 명인 학교도 그 학생을 제대로 교육하려면 열 과목이 넘는 모든 과목의 선생이 필요한 것처럼 우리가 우리 아이를 안전하고도 온전하게 키우는 데도 그 집 부모뿐 아니라 전체 마을의 관심과 배려가 필요한 법이다. 작게는 이웃이고 크게는 마을이 나서야 하는 것이다.

이름을 다시 반복해 말하는 것이 우리 모두에게 고통스러운 일이기는 하지만 혜진과 예슬의 경우와 일산의 여자아이가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다. 똑같은 위험 속에서 한쪽은 아무도 그 일을 몰라 전혀 도움을 받지 못했고, 한쪽은 비명을 신호로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위기를 모면한 차이뿐이다.

한번 이런 사건이 있으면 남자들도 동네 아이나 숙녀와 한 엘리베이터를 타는 걸 왠지 꺼리게 되고 피하게 된다. 지나가는 동네 아이들에 대해서도 전혀 관심을 두지 않게 된다. 여자와 아이들이 위축되듯 남자들도 일부러 오해받거나 눈총받을 필요가 없다는 식이 된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야말로 오히려 이웃간의 관심을 줄여 또 다른 낯선 사람을 자기 대신 그 공간에 끌어들이게 되는 것이다.

일산의 초등학생 성폭행 미수사건의 피해자를 구한 대학생은 자신도 나서기가 두려웠지만 아이의 살려달라는 비명을 어떻게 모른 척할 수 있었겠느냐고 말한다. 아이를 대상으로 한 흉악범죄의 절반 이상이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 의해 저질러진다고 한다. 그러나 서로 얼굴을 알기에 그런 범죄를 막을 수 있는 사람도 멀리 있는 경찰이 아니라 늘 가까이에서 서로 얼굴을 대하는 이웃 사람들인 것이다. 이웃과 마을의 관심만이 흉악범죄로부터 우리 아이를 보호하는 것이다.

이순원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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