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입력 2008년 2월 1일 02시 42분
공유하기
글자크기 설정
어느 날 그는 오스트라키스모스(도편추방제·陶片追放制) 투표장으로 가다 한 문맹자를 만난다. 오스트라키스모스는 시민들이 질그릇이나 조개껍데기에 추방하고 싶은 이의 이름을 쓰고, 가장 이름이 많이 나온 사람을 10년간 추방하는 제도.
문맹자는 그에게 ‘아리스티데스’라고 써 달라고 부탁했다. 이유를 묻는 그에게 돌아온 대답. “전혀 모르는 사람이지만, 사람들이 하도 ‘의인(義人)’이라고 하는 소리가 듣기 싫어서….”
아리스티데스는 묵묵히 자신의 이름을 써 줬고, 그해 추방자로 결정돼 유배의 길을 떠났다.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달 28일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마련한 정부조직 개편안을 격렬히 성토했다. 이틀 뒤 청와대는 노 대통령의 고향인 경남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 주변의 경관 조성에 대해 ‘청와대가 아니라 김해시가 추진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남이 하는 일은 철저히 깔아뭉개면서도 내가 하는 일은 ‘한 점 부끄럼 없다’는 이 정권의 DNA가 그대로 드러나는 대목이다. 어쩌면 노 대통령의 귀향과 봉하마을 및 주변 조성 자체가 현 정권의 축소판이라는 생각이다.
첫째, 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 노 대통령은 취임 초에는 ‘임기가 끝난 후 임대주택으로 들어가겠다’고 했다. 하지만 이어서 ‘임대주택 입주 자격이 안 된다’며 귀향해 생태운동을 하겠다고 했다. 귀향하는 첫 전직 대통령이자 생태운동가로의 변신…. ‘쿨’하게 들렸다.
하지만 결과는 어떤가. 노 대통령이 돌아갈 집은 소박한 임대주택에서 3991m²(약 1200평)의 터에 건물 연면적 933m²(약 280평)인 저택으로 바뀌었다. 이렇듯 포퓰리즘은 구호는 멋있지만 결과가 씁쓸하다.
둘째, ‘남이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맨스.’ 노 대통령은 집터를 후원자인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 측근으로부터 샀다. 3.3m²당 15만 원의 가격이 싼지, 비싼지는 모르나 권력자로서 적절한 처신은 아니다. 노 대통령을 비롯해 함께 입주할 측근과 경호원 등을 합쳐 100가구도 안 되는 농촌마을에 도시가스가 들어가는 것도 매우 이례적이다.
셋째, ‘패거리즘.’ 사저 인근에는 측근과 경호원 등이 입주할 연립주택도 5동 14채가 들어선다. 사실상 ‘노무현 타운’이다. 거기서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와 ‘삼겹살 파티’를 벌이겠다는데, 그 ‘전초전’으로 지난달 13, 19, 20일 1800여 명의 노사모 회원을 청와대로 부르거나 등산을 함께했다.
넷째, 세금 남용. 봉하마을과 주변을 단장하는 데 400억 원이 넘는 세금이 퍼부어진다. 청와대는 김해시가 하는 일이라지만, 노 대통령이 질박한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원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다섯째, 품격의 문제. 임기 후반에 대대적으로 사저와 주변 공사를 벌이는 것도 그렇지만, 노 대통령은 지난해에만 5번이나 집 공사 중인 고향을 찾았다.
다시 아리스티데스로 돌아가자. 추방당한 그는 몇 년 후 페르시아가 그리스를 침공(기원전 480년)하자 추방 여론을 일으켰던 정적 테미스토클레스의 ‘SOS’를 받고 귀국한다. 그는 이듬해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 아테네 총사령관을 맡아 페르시아를 격퇴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후세 사가들은 그를 ‘공명정대한 의인’으로 평가했다.
박제균 정치부 차장 phar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