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정은숙]‘우생순’이 준 소중한 선물

  • 입력 2008년 1월 22일 0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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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럴 줄 알았다. ‘우생순’이라고 약칭해서 불리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이 나를 울리고, 가족도 울리는 필독 관람영화로 등극할 줄을. ‘와이키키 브라더스’로 마니아를 확보한 임순례 감독의 7년 만의 이 작품은 개봉 전부터 많은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냉혹한 현실 당차게 뛰어넘어

핸드볼 선수가 주인공인 스포츠영화라는 것, 출연 배우들이 몸을 사리지 않고 운동선수와 거의 같은 강도로 훈련을 받았다는 것 등은 슬쩍 영화잡지만 들춰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을 정도로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줄거리도 스포일러 수준으로 이미 공개됐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2004년 아테네 올림픽 결승전의 결과가 이를 말해 주고 있으니까. 그래도 영화에 대한 기대감을 감출 수는 없었다. 임 감독은 비주류 사람들에 대한 생생한 묘사로, 삶과 인간의 존엄을 일깨우는 작품을 만들어 왔기 때문이다.

한데 후배 몇 명은 이 영화를 기대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아줌마 선수들의 활약이 두드러진 감동극’에 대해서 ‘너무 뻔할 것이다’는 이유에서였다. ‘아줌마’만 나오면 왠지 칙칙해지거나 우스꽝스러워지는 기왕의 영화를 보면서 갖게 된 편견 때문이기도 하겠다.

막상 영화를 보니 출연배우들은 소문 그대로였다. 누구도 예쁘게 보이려고 하지 않았다. 아니 그래서 그녀들은 더 예뻤다. 핸드볼계의 별이었던 선수들이 각각 결혼하고 어려운 현실을 살다 올림픽을 위해 국가대표선수로 복귀하면서부터 영화의 긴장감은 고조되기 시작한다. 모든 것을 바쳐 한순간을 화려하게 꽃피웠던 선수들에게 현실은 지리멸렬한 것이었다. 누구는 사채에 쫓기는 남편 때문에, 누구는 이혼 때문에, 누구는 불임으로 제각기 삶에 치여 있었던 것이다. 이제 그녀들에게 코트는 유일한 구원의 상으로 떠오른다.

그러나 코트 또한 엄혹한 현실이기에, 후배들의 몰이해와 감독과의 불화로 그들은 여전히 불안한 삶을 이어간다. 희망이 있다면 그들에게는 목표가 분명하다는 것. 사연은 달라도 경기장에 나서는 그 순간만은 각자의 생애, 아니 그들이 함께한 생애 최고의 순간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영화는 배우의 입을 통해 아름다운 잠언을 쏟아내기도 한다. “너 혼자 이 경기 뛰는 것 아니다.” “그래 아이 낳고 보니 세상이 달라 보이더라, 다른 사람 처지도 볼 줄 알고.” “나는 포기하지 않을 테니 당신도 포기하지 마.” 그녀들은 ‘함께 잘살고 행복해야 한다’는 우리 사회의 당위적 명제들을 폼 잡지 않고, 몸으로 진솔하게 일깨워줬다.

그 마지막 경기, 연장전까지 동점을 이뤄, 결국 승부던지기로 금메달과 은메달을 가름하는 순간, 아쉽게도 이미 다 알고 있듯 그녀들은 졌다. 하지만 우리는 누구도 그녀들을 2등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들은 제대로 승리하는 법을 보여 주었기에, 그녀들 생애 최고의 순간을 보냈기에 말의 참된 의미 그대로 1등인 것이다. 성적이 모든 것을 말해 준다는 스포츠에서조차도 자신에게 최선을 다한 선수에게는 1등이 부럽지 않을 순간이 오롯이 주어진다는 것을 영화는 보여 준다. 하물며 성적을 매길 수 없는 인생에 빗대어 본다면 더 말해 무엇하랴. 누가 1등이고, 누가 2등이겠는가.

한국인 ‘불굴의 의지’ 환기시켜

나는 ‘우생순’이 전하고 싶어 하는 메시지를 이렇게 이해했다. 삶이 우리를 속일지라도 노여워하지 말라, 우리가 비록 오늘 사는 것이 누추할지라도 최고의 순간은 바로 자신의 힘으로 만드나니, 최선을 다해 그 순간을 우리 함께 이루자고. 또한 눈물바람이나 하는 아침드라마의 아줌마가 아니라 현실을 사는 아줌마는 불굴의 의지로 자신의 세계를 스스로 가꿀 수 있다는 메시지도 덤으로 얻었다.

정은숙 마음산책 대표·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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