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장복동 일병의 수통

  • 입력 2006년 11월 21일 22시 54분


6·25전쟁 중이던 1951년 1월 강원 홍천에서 전사한 장복동 일병(당시 26세)의 유해가 55년 만에 가족 품에 돌아왔다. 유해를 수습했던 홍천군 내면 율전2리 주민들이 육군 유해발굴단에 제보를 해서 거둔 결실이다. 유품(遺品)인 스테인리스 수통에 못으로 새긴 ‘張福東’이란 이름이 신원을 밝힌 단서였다니 세월을 뛰어넘은 역사의 무게에 새삼 고개가 숙여진다.

장 일병의 수통은 우리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지만 아직도 우리 산하(山河)에는 대한민국을 지키다 숨져 간 이름 모를 호국 장병들의 유해가 그대로 묻혀 있다. 10만3000여 명에 이르는 6·25전쟁 전사·실종자 가운데 2000년부터 시작된 발굴 작업을 통해 수습한 유해는 1500구에 불과하다. 그나마 신원이 확인된 유해는 52구, 유가족이 확인된 유해는 22구뿐이다.

어제는 1994년 북한을 탈출해 남으로 돌아온 ‘귀환포로 1호’ 조창호(예비역 중위) 씨의 장례식이 향군장(鄕軍葬)으로 거행됐다. 1951년 강원 인제 전투에서 북의 포로가 된 그는 탈출하려다 붙들려 13년간 지옥 같은 감옥 생활을 했고, 풀려난 뒤에도 30년간 탄광에서 강제 노역을 했다. 그는 76세로 눈을 감기 전까지 “북에서 강제 노역으로 죽어 가는 540여 명의 국군포로를 정부가 외면하면 누가 나라를 위해 싸우겠느냐”고 절규했다.

이렇게 6·25는 ‘현재진행형’이다. 지금도 병상에서 신음하고 있는 전상자(戰傷者)들, 1000만 이산가족들도 이를 몸으로 말해 준다. ‘북한이 핵을 포기하면 종전(終戰)을 선언하겠다’는 미국의 제안도 6·25가 정전(停戰) 상태일 뿐, ‘끝나지 않은 전쟁’임을 일깨워 준다.

그런 가운데 캄보디아를 방문 중인 노무현 대통령이 6·25를 ‘내전(內戰)’이라고 한 것은 적절치 못했다. 6·25를 ‘통일전쟁’으로 보는 좌파 진영의 주장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6·25는 북한 공산집단이 일으킨 전쟁 범죄다. 스탈린의 사주를 받은 대리전이라는 사실도 옛 소련 문서를 통해 드러난 지 오래다. 장 일병의 수통을 보면서 대통령의 ‘내전 발언’을 들어야 하는 우리의 가슴은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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