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오명철]‘자전거 도둑’

  • 입력 2006년 10월 18일 21시 09분


‘자전거 도둑’이란 영화가 있다. 비토리오 데 시카 감독이 제2차 세계대전 후 패전국 이탈리아의 빈곤과 모순을 사실적 영상으로 그려낸 네오리얼리즘 계열의 대표작 중 하나다. 감독은 자전거를 잃어버린 부자(父子)가 결국 자전거 도둑이 되는 과정을 통해 ‘생은 결코 아름답지 않지만 살 만한 가치는 있다’는 명제를 슬프지만 아름답고, 허탈하면서도 희망을 담아 그려 낸다.

‘자전거쯤이야…” 하는 세태

느닷없이 흘러간 추억의 흑백영화 한 편을 떠올리는 것은 최근 하루 만에 자전거 두 대를 도둑맞았기 때문이다. 그것도 동(棟)마다 경비원이 24시간 지키고 있는 서울 서초구의 한 아파트 단지에서다.

얼마 전 인터넷을 통해 싸구려 중국산 자전거 한 대를 구입했고, 내친김에 오랫동안 아파트 난간에 매어 두었던 낡은 국산 자전거도 손질해 번갈아 타고 다녔다. 자가용 두 대를 새로 갖게 된 듯 뿌듯한 심정이었다. 하지만 일주일도 못 돼 행복은 송두리째 깨졌다. 휴일 오전 중고 자전거를 아파트 1층 계단 밑에 잠금장치 없이 두었다가 2시간여 만에 도난당한 것이다. 서둘러 아파트 상가 옆의 자전거 보관소에 새로 산 중국산 자전거 한 대를 매 두었는데 이날 밤 이마저 없어졌다. 누군가 잠금장치를 부수고 가져갔다.

하루에 자전거 두 대를 도둑맞고 보니 더럭 겁이 났다.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된다고, 자전거 도둑이 골프채 세트나 승용차 도둑 또는 강력범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누군가 호시탐탐 내 주변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이 떨리고 두려웠다.

곧바로 관리사무소에 신고했다. 담당자는 ‘뭘 그런 하찮은 일을 다 신고하느냐’는 듯 심드렁한 반응이다. “이 아파트에만 300여 대의 자전거가 있는데 자전거 분실 도난이 수시로 일어나므로 입주자들이 알아서 관리해야 한다”고 했다. 그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반드시 근거를 남기고 필요하다면 제도적 개선책을 마련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는 “대부분 청소년들이 장난삼아 타고 가 버리는 경우가 많고, 잃어버려도 찾으러 다니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정말 문제라는 생각이 들어 그 길로 인근 치안센터에 가 신고했다. 현장에 온 경찰관은 “관내에서 자전거를 도둑맞았다는 신고는 처음”이라고 하면서도 진지하게 상황을 접수했다. 마찬가지로 “자전거 도둑을 근절하기 위한 종합 치안대책을 마련해 달라”고 당부했다. 이런 문제야말로 민생치안(民生治安)이 아닌가. 올 한 해 국내 자전거 시장 규모는 2000억 원을 넘는다.

1948년 이탈리아의 ‘자전거 도둑’과 2006년 한국의 ‘자전거 도둑’이 나오게 된 상황은 물론 판이하다. 전자가 실업 또는 생계형이라면 후자는 장난 또는 과소비형이다. 하지만 ‘2006년 한국의 자전거 도둑’이 함축하는 메시지는 결코 작지 않다.

자전거 대책은 민생치안

아이들이 아무런 죄의식 없이 자전거를 훔친다면 학교에서 교육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고, 자전거 분실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가정에서 물건의 소중함을 가르쳐야 한다. 좀도둑이나 전문 절도단의 소행이라면 관리사무소나 경찰에서 종합 대책을 세워야 하며 제조업체는 도난 방지 장치 개발을 서둘러야 한다.

자전거 도난은 결코 한 개인, 어느 아파트 단지만의 문제가 아니다. 자전거를 잃어버린 시민의 분노와 허탈감, 이웃과 사회에 대한 불신, 청소년의 도덕적 불감증은 의외로 심각하다. 자전거가 자동차 못잖은 재산목록이던 시대를 살아온 사람으로서 남다른 사명감을 느낀다. 중국의 수도 베이징은 거시적(擧市的)으로 자전거 도둑과의 전쟁을 벌이고 있고, 캐나다 토론토대는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 도입으로 자전거 도난 방지에 나섰다. 관심 있는 분들의 ‘작지만 거룩한 분노’를 기대한다.

오명철 편집국 부국장 osca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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