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육정수]법관이라는 자리

  • 입력 2006년 7월 24일 03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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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법정(法廷) 영화를 보면 변호사를 비롯한 재판 관련자들이 말끝마다 ‘유어 아너(Your Honor)’라며 법관에 대한 존경심을 깍듯이 표시한다. 국내 법정에서도 ‘존경하는 재판장님’이라는 말을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다.

겉치레로 들릴 수도 있으나 이 표현은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법관이란 자리의 신성함을 이만큼 단적으로 공인하는 표현도 없을 것 같다. 이는 법관 개인을 숭배하거나 찬양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공적(公的) 재판관으로서 부끄럽지 않은 판결을 해 달라는 주문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최근 카펫 수입업자, 지역 유지와 어울리며 수천만 원대의 금품과 향응, 아파트 공짜 입주 편의, 골프 접대 등을 받고 이들의 ‘후견인’ 역할을 해 왔다는 의혹을 사고 있는 법관들이 비난을 받고 있다. 법관들의 비리 의혹이 불거진 이후 법정 안팎에서는 피고인 소송 당사자 등이 걸핏하면 항의 소동을 벌여 법관들을 곤혹스럽게 만든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놀랍게도, 고법 부장판사와 사귄 카펫 수입업자는 검사 경찰관 등도 매수해 청탁한 사건의 90%를 성공시킨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법관 3명을 자기편으로 만든 전북 군산의 지역 유지는 횡령 혐의로 구속된 뒤 구속적부심에서 석방되는 뒷심을 과시했다.

믿었던 이들 법관 때문에 패소하고 마음고생을 한 선량한 피해자들의 심정은 어떨까. 이렇게 정의와 진실이 마구 짓밟혀 버린다면 재판은 무의미하다. ‘유전무죄 무전유죄(有錢無罪 無錢有罪)’ 소리도 이젠 지긋지긋하다.

법관을 ‘존경하는 재판장님’으로 떠받드는 것은 그 자리의 무거운 소명(召命) 때문이다. 근본적으로 인간이 인간을 정확히 심판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따라서 법관직은 어찌 보면 ‘신(神)의 영역’에 도전하는 권력이다. 예부터 법관들에게 엄격한 자기관리를 요구해 온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과거 어느 고위 법관은 법관의 처지를 이렇게 비유했다. “법관은 어릴 적 홍역에 걸렸을 때 방 안에 격리돼 창밖에서 친구들이 뛰어노는 것을 바라보고 있는 아이처럼 욕구불만에 빠지기도 한다.” 이처럼 갑갑한 법복으로부터의 탈출을 꿈꾸기도 하지만 법관이 치러야 하는 가장 큰 희생은 사람들과 멀어져야 하는 것이라고 그는 강조했다.

‘청렴과 강직의 대명사’라 할 만한 초대 대법원장 가인 김병로(街人 金炳魯) 선생의 말씀을 오늘의 법관들이 되새겨 보기를 권하고 싶다. “세상의 권력과 금력과 인연 등이 우리들을 둘러싸고, 유혹하며, 정궤(正軌)에서 일탈하도록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고 있는가. 만약 내 마음이 약하고 힘이 모자라서 이런 유혹들에 넘어가게 된다면 인생으로서의 파멸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법관의 존엄성으로 비추어 보아도 용인할 수 없는 심각한 문제다.”

이 말을 한 지 6개월 뒤 어느 지방법원장이 변호사에게서 45만 환을 받은 혐의로 구속되자 가인은 전국법원수석부장판사회의를 열어 “청렴의 본분을 지킬 수 없다고 생각될 때는 사법부의 위신을 위해 사법부를 떠나라”고 꾸짖었다.

시대가 바뀌었어도 외부 인사와의 식사와 골프 등 의심받는 행동을 스스로 삼가면서 외로운 길을 걷는 ‘존경하는 재판장님’도 적지 않다. 그러나 가인의 말씀이 반세기 이상 흐른 오늘도 메아리치는 까닭은 그렇지 않은 법관에 대한 실감(實感)이 국민 속에 만만찮게 쌓이고 있기 때문이다.

육정수 논설위원 sooy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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