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실 X파일 ]범인 행세하며 발품… 결론은 범죄환경

  • 입력 2006년 6월 30일 0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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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남부 연쇄 살인, 대전·마포 연쇄 강간…. 올해 들어 벌써 몇 건이야?”

경찰이 연쇄 강력범죄의 고리를 끊기 위해 여러 가지로 묘안을 짜 보지만 조속히 범인을 체포하는 것밖에는 아이디어가 잘 떠오르지 않는다. 잡아서 처벌해도 끝이 아니다. 이런 양상이 자꾸 되풀이되니 말이다.

범죄심리·예방을 전공한 내게 ‘묘안’이 없냐고 조언을 구해왔다. 엉뚱하지만 ‘범인’ 행세를 한번 해 보기로 했다.

연쇄 살인이 일어난 다세대 주택가를 다리품 팔며 샅샅이 살펴봤다. 마치 범인이 ‘일을 저지르기’ 전에 어느 집을 어떻게 침입할까 계획을 세우듯.

피해를 본 집과 유사한 주택을 골랐다. 대문을 살짝 밀어 봤다. 이럴 수가. 열려 있었다. 주위를 둘러봤다. 감시카메라 한 대 없었다. 낯선 사람이 이웃집에 들어가려는 것을 제지하는 사람도 없었다. 대문 안쪽에도 집 지키는 개 한 마리 없었다. 그야말로 무방비 상태.

영국에서 수년간 범죄자의 심리와 행동을 분석하면서 서양인들은 특이한 방식으로 범죄문제에 접근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범죄자 자체가 아니라 주변 환경을 바꾸는 것이다.

인적이 드문 샛길에는 열쇠가 있는 주민만 통과할 수 있는 방범대문을 설치한다. 쉽게 넘거나 부술 수 없어야 함은 물론이다. 넓은 범위까지 비출 수 있도록 가로등은 높이를 낮추고 보행자 얼굴을 잘 알아볼 수 있게 밝기를 조절한다.

가로수나 조경 관리도 철저히 한다. 아무렇게나 무성하게 자라는 나무는 자연스러운 감시나 관찰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또 주민들이 거리에 많이 나와서 활동하도록 유도한다.

환경을 바꿔 범인의 몸과 마음을 ‘힘들게’ 하면 범죄가 줄어든다는 연구결과도 나와 있다.

연쇄 강력 범죄자들을 분석해 보면 처음부터 흉악범죄를 하겠다고 마음먹은 경우는 많지 않다. 대문이 열려 있는 집에 들어가 좀도둑질을 시작했다가 의외로 쉽다는 생각에 더 심각한 범죄에 대한 유혹을 떨치지 못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범죄에 유리하게’ 설계된 환경은 오히려 범죄자를 부추길 수 있다.

올해 초 영국에서 환경설계와 범죄예방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뒤 한국에 돌아와 경찰, 건설교통부, 지방자치단체, 건축학자 등에게 이 내용을 설명했다. 공감만큼 실천이 뒤따르기 바란다.

박현호 경찰대 경찰학과 교수 policesecurit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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