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홍진표]左든 右든 독선을 버려야 논쟁이 산다

  • 입력 2006년 6월 15일 03시 00분


이번 5·31지방선거의 결과는 특정 정당에 대한 찬반만 표시한 게 아니다. 이를 넘어 지식계와 정치권에 오랜 퇴행과 혼란을 극복할 한국의 미래 비전을 제시하라는 민심의 절실한 요청이 담겨 있다고 해석된다.

한국의 미래에 대한 진지한 탐구와 활발한 논의가 가능하려면 첫째로 좌와 우 또는 진보와 보수의 내부에서부터 시시비비를 가리는 논쟁이 활성화되어야 한다. 본래 1980년대 운동권은 NL(민족해방) PD(민중민주)로 대표되는 치열한 내부 논쟁 속에서 성장했으며, 어떠한 비판의 성역도 없다는 정신이 살아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집권과 더불어 주류가 되자 어느 순간 내부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 폐쇄성에 빠지고 말았다. 예컨대 북한 인권을 거론하면 배신자 취급을 받는다.

한편 우파에는 두 번의 대선 패배의 후유증 때문인지 내부 논쟁을 경계하는 분위기가 있다. 논쟁이 분열로 이어지거나 비치지 않을까 하는 우려이다. 그러나 1987년 대선에서 양김의 분열이 민주화 세력의 분열로 이어졌듯이, 통상 선거전에서의 분열은 이념과 정책의 차이가 아닌 후보의 분열에서 비롯됐다. 정치적 단결을 이유로 사상적 단결을 강조하게 되면 시대 변화에 따른 새로운 사상의 전개를 이단시하거나 다른 사조의 긍정성을 수용하는 포용력을 약화시킨다. 예컨대 뉴라이트의 ‘사상의 자유’ 주장에 대해 ‘좌파와 다름없다’는 식의 낙인찍기나 선명성 경쟁으로 몰고 가는 것은 토론의 진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둘째, 극한의 정파 대립에 의해 실종되어 버린 민주적 포용력이 회복되어야 한다. 집권 여당의 지도자들은 스스로 ‘양심세력’이니 ‘평화세력’이니 자처하는데, 그렇다면 다른 세력은 반(反)양심적이고 호전세력이라는 것인가. 선과 악의 이분법을 들이대는 이런 독선이 근절되지 않고서 그 누가 자유로운 토론에 참가하겠는가.

다른 의견에 대한 개방성과 포용력은 삿대질 안 하고 얼굴을 붉히지 않는다는 소극적 차원을 넘어 사상과 이론 역시 종국에는 국민의 판단과 현실의 검증에 맡겨져야 한다는 자유주의 원칙의 공유가 필요하다. 밀이 ‘자유론’에서 설파했듯이 어떤 주장이 세상에 나올 수 있느냐 없느냐를 미리 결정하는 판관은 불필요하다.

좌파적 경향을 공론의 장에서 원천적으로 배제한다는 극단적 반공주의 또한 오늘의 시대상황에는 통제와 독선의 어두운 상징으로 남아 버렸다. 이미 사회주의 실험의 역사적 실패가 명확해진 상황이다. 일각에서는 북한의 위협을 근거로 그 필요성을 말하지만 북한 정권은 이미 사회주의와는 아무런 인연도 없는 마피아와 유사한 범죄집단일 뿐이다.

반공주의는 지난날 결국 사상통제로 흘러 많은 지식인의 반발을 불러왔고, 우파 지성의 선도성과 헤게모니를 약화시켰다. 근래 남북관계 진전을 틈타 강정구 교수류의 친북 좌파 주장이 양지로 나오게 되자 ‘좌경 운동권이라는 말은 군사정권의 조작’이라고 여기던 국민이 그 본질을 알게 되었다. 개방의 효과다.

마오쩌둥이 “조사하지 않으면 발언하지 말라”고 했듯이 근거를 가지고 주장을 펴는 풍토를 만들어 가야 한다.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의 피습을 놓고 미국이 개입된 자작극이라는 친북 집단의 주장쯤은 너무 유치한 정치선전이라 그냥 무시하면 그만이겠지만, 논증을 생명으로 삼는 지식인의 일부도 명확한 사실과 논리의 근거 없이 앙상한 결론만을 공론의 장에 내놓는 풍토에서 생산적 토론이란 기대하기 어렵다.

홍진표 자유주의연대 집행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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