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입력 2006년 3월 18일 03시 06분
공유하기
글자크기 설정
하지만 초등의 환희는 잠시, 밤이 찾아오고 있었다. 서둘러 정상에서 내려오던 그는 아이젠(등산화 바닥에 덧신는 미끄럼 방지 용구) 한 짝마저 잃어버린다. 등정에 앞서 몸을 가볍게 하기 위해 비박(텐트 없이 밖에서 밤을 보내는 것)에 필요한 장비도 버린 뒤였다. 가파른 정상 근처라 앉을 곳도 없었다.
여기서 불은 세계 등반사에 남을 결단을 내린다. 꼿꼿이 선 채로 ‘죽음의 비박’에 들어간 것. 그는 ‘잠들면 죽는다’고 속으로 외치면서 선 채로 밤을 지새운 뒤 살아 내려왔다.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8000m급 고봉 14좌를 완등한 전설적인 등반가 라인홀트 메스너는 불이 ‘죽음의 비박’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정상을 밟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심산의 ‘마운틴 오딧세이’)
어떤 분야에서건 정상에 오른 경험은 경이롭다. 문제는 언제까지나 정상에 머무를 수 없다는 사실. 누구나 하산을 해야 한다.
산을 오를 때보다 내려갈 때 조심해야 한다는 것은 어느 정도 등산을 해 본 사람은 다 안다. 다리가 풀리기 때문에 긴장을 느슨히 했다간 다치기 십상이다. 범부(凡夫)의 하산도 이럴진대, 훨씬 높이 올라가 황홀한 ‘정상 경험’을 한 권력자의 하산은 그만큼 힘들고 위험하다.
첫째, 내심 하산을 거부하고 언제까지나 정상에 머물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착각은 이해찬 국무총리의 경우처럼 독선과 오만을 부른다. 산에서 독선과 오만은 추락으로 이어진다.
둘째, 산을 오를 때와 달리 하산 길에는 리더의 영이 잘 먹히지 않는다. “참여정부에 레임덕은 없다”고 강변하지만 불안감의 표현일 뿐이다.
셋째, 2인자의 ‘치받기’, 좋게 말하면 ‘차별화’도 기다리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열린우리당 정동영 의장의 건의를 받아들여 이 총리를 경질하는 형식을 취한 것도 이런 과정의 서곡인지 모른다.
넷째, 산을 오를 때는 나타나지 않던 리더 주변의 흠도 드러나기 시작한다. 역대 정권에서 대통령 가족과 친인척 및 측근의 비리, 권력형 부패가 노출된 것은 거의 다 집권 4년차 이후다.
다섯째, 차기 리더가 등을 돌리면 하산해도 발 뻗고 잘 수 없다. 전두환 대통령은 후임 노태우 대통령에게 ‘6·29선언’이라는 선물을 줬지만 백담사에 가야만 했다. 노태우 대통령 자신도 후임 김영삼 대통령 때 감옥에 갔다.
역대 권력자 가운데 안전하고 편안한 하산에 성공한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은 그만큼 권력의 하산 길이 위험하다는 뜻이다. 안전한 하산을 위해서는 정상에 오르자마자 하산을 생각하고, 하산 길은 물론 정상에서도 겸허해야 한다는 게 산악인들의 얘기다.
한국인으론 처음 히말라야 8000m급 14좌를 완등한 엄홍길 씨는 최근 사석에서 만난 필자가 “히말라야 고봉의 정상에 섰을 때 어떤 느낌이었느냐”고 묻자 이렇게 답했다. “기쁨은 잠깐, 내려갈 일부터 생각한다. 무사히 베이스캠프까지 내려왔을 때 비로소 ‘성공했구나’ 하는 엄청난 환희가 밀려온다.”
박제균 정치부 차장 phark@donga.com
구독
구독
구독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