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눈/제라르 뱅데]표현의 자유와 종교의 자유

  • 입력 2006년 3월 17일 03시 0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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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든 조롱할 수는 있다. 그러나 상대를 가려서 할 필요가 있다.”

유머에 관한 프랑스 격언이다. 얼마 전까지 유럽과 아랍 세계를 뜨겁게 달궜던 ‘마호메트 만평 사태’를 보면서 이 격언이 다시 떠올랐다. 지난해 9월 덴마크의 한 신문이 마호메트를 풍자한 만평 12컷을 게재했고, 이어 유럽의 다른 신문들이 이 만평을 전재함으로써 아랍권의 시위는 폭력적인 양상으로 치달았다.

당시의 시위에선 내부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체제가 새로운 지지를 끌어내려는 차원에서 벌이곤 하는 선동 또는 조작이 눈에 띄었다. 가장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던 나라를 따져 보면 재미있는 결과가 나온다.

팔레스타인 시리아 레바논 이란에 아프가니스탄까지 모두 내부 혼란을 겪고 있는 나라들이다. 반대로 모로코 알제리 튀니지 같은 북아프리카 국가와 이집트에선 그런 소란이 없었다. 어떤 이슬람 커뮤니티건 만평으로 인해 상심한 것은 마찬가지일 텐데도 말이다.

이번 사태는 두 문명의 충돌로 인해 빚어졌다. 표현의 자유를 민주주의의 주춧돌로 생각하는 서구 사회와, 예언자의 법이 민간 법에 우선하는 이슬람 사회의 문화가 정면으로 충돌한 것이다.

양쪽 사회는 각기 다른 진화 과정을 거쳐 왔다. 유럽 역시 피비린내 나는 종교전쟁을 겪었다. 그에 대한 반발로 정교 분리가 진행됐다. 얼마 되지 않은 과거의 일이다. 프랑스에서 정교 분리가 시행된 것은 1905년이다.

서구 사회에서 종교적 기준이 자리를 잃는 동안 이슬람 세계는 몰락한 자신의 처지를 놓고 종교적 급진주의 속에서 위안을 찾았다. 과거 영광의 역사를 떠올리며 커뮤니티의 정체성을 찾는 데 종교를 동원한 것이다. 방법은 잘 알려진 대로다. 커뮤니티의 단결을 이끌어내기 위해 외부의 적을 설정하는 단순한 방법이다.

이 외부의 적은 다름 아닌 서구이며 유럽이다. 지도자들은 줄곧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종교가 공격당하고 있는 것으로 믿게 했다. 그런 과정을 거치는 동안 ‘이슬람’은 곧 ‘테러리즘’으로 연결되는 이미지의 왜곡이 일어났다. 실제 서구의 상당수 사람은 이슬람과 테러리즘을 동일시한다.

교조주의자들로 인해 특정 종교에 왜곡된 이미지가 생기는 일이 많다. 무슬림은 물론 유대인이나 기독교인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이들이 서로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왜곡된 이미지를 불식시키려는 노력을 그다지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커뮤니케이션 기술의 발달로 세계는 더욱 가까워졌다. 다른 문명과의 교류는 늘어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모든 사람이 예전보다 더욱 상대를 인정하고 관용을 베풀어야 할 때다. 즉 우리가 사는 세상의 특징인 다문화주의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이번 만평 사태에 대한 바티칸의 의견 표명도 이런 보편적인 생각의 연장선에 있다. 바티칸은 “표현의 자유도 존중돼야 하지만 종교적 감정을 다치게 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국제사회가 질서를 구축하는 유일한 방법은 각자가 믿고 있는 것을 존중해 주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모든 부분에서 상대방을 이해해야 한다. 그렇게만 되면 특정 신앙이나 가치가 다른 것을 지배해야 한다고 믿는 ‘정복자 정신’을 막을 수 있다.

이슬람 세계도 마찬가지다. 급진주의자들의 목소리에 솔깃해 다양한 문화와 의견을 배척하기만 하면 민주주의도 현대화도 존재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표현의 자유 없는 민주주의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표현의 자유가 때로 지나치거나 오류가 있더라도 말이다.

제라르 뱅데 에뒤프랑스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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