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702>卷七. 烏江의 슬픈 노래

  • 입력 2006년 2월 28일 03시 0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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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패왕이 진작 여음(汝陰)에서 회수를 건너 육현(六縣)으로 가는 것이 옳았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때는 아직도 대사마 주은(周殷)이 한나라에 항복하지 않은 때라 그와 더불어 경포를 물리치고 육현을 구했으면 구강(九江)을 지킬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그 뒤 한왕의 대군이 회수를 건너느라 시일을 끄는 동안 동쪽으로 강동과 연결하여 세력을 키우고 맞섰으면 넉넉히 한왕을 물리칠 수 있었을 것이라는 게 그들이 안타까워하는 까닭이다.

처음부터 패왕에게는 달리 선택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곧 진성의 싸움 뒤로 줄곧 몰리다가 해하에서 한나라 대군에게 포착되어 섬멸 당했을 뿐이라고 보는 사람들이다. 자치통감(資治通鑑)이나 사기(史記)의 ‘항우 본기’로만 본다면 ‘해하(垓下)의 결전’ 같은 것은 없었다고 하는 이들이 옳은 듯도 하다. 양쪽 모두 패왕은 ‘군사가 적고 먹을 것이 떨어져[병소식진]’ 해하 진채의 방벽(防壁) 안으로 쫓겨 들어갔다가 이내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게 되는 것처럼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사기의 ‘고조 본기’나 ‘회음 후 열전’은 또 다르다. 그 싸움의 자세한 경과와 거기서 쓰인 전략전술까지 기록하고 있어 해하에서 치열한 결전이 있었음을 전해 준다.

거기다가 패왕 항우의 성품으로 미루어 보아도 해하를 결전의 장소로 삼은 것은 그의 선택이었음에 틀림없는 것 같다. 불같고 직선적인 패왕의 성품에 지구전(持久戰)이나 장기적이고 정밀한 전략은 맞지 않는다. 설령 그의 본능적인 전투감각이 그 유리함을 감지했다 해도 그대로 따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너무 급작스러운 형세의 역전도 냉철한 퇴각 결정을 막았을 것으로 보인다. 비세(非勢)로 몰린 게 어이없을 만큼 갑작스러운 데다 아직 그리 오래되지 않아 패왕은 그 비세를 실감하기는커녕 인정하기조차 어려웠을 것이다. 따라서 그런 패왕에게 중원을 버려두고 강동으로 물러나 뒷날의 기약을 바랄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해하에 자리 잡은 패왕이 사방에 사람을 풀어 흩어진 서초의 군사들을 거두어들이게 하자 초군의 세력은 급속하게 불어났다. 보름도 안돼 여기저기서 찾아든 장졸이 2만이 넘어 어느새 패왕의 군세는 5만을 헤아리게 되었다. 그게 다시 패왕의 자신감을 키워 해하를 반격의 거점으로 삼는다는 결정을 더욱 흔들림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그날 다시 패왕과 초나라 군사들의 기세를 크게 드높여 준 일이 생겼다. 몸소 방벽 쌓는 일을 도우며 군사들을 다잡던 패왕이 군막으로 돌아와 쉬려 할 때였다. 멀리 북쪽을 살피러 나갔던 탐마가 급하게 돌아와 들뜬 목소리로 알렸다.

“대왕, 기뻐하십시오. 계포 장군이 3만 군사를 모아 돌아오고 계십니다. 지금 30리 밖에서 군사들을 쉬게 하면서 먼저 대왕께 소식 전하라 이르셨습니다.”

광무산을 떠날 때 패왕은 계포에게 군사 1만을 갈라 주며 관영의 공격을 받고 있는 팽성을 구하라고 먼저 보냈다. 그러나 계포는 산동 남쪽을 지나는 중에 조참의 대군을 만나 한 싸움을 크게 지고 우현(虞縣) 부근의 작은 산성에 갇혀 있다고 듣고 있었다. 그 계포가 원래보다 몇 배나 되는 대군을 이끌고 적지나 다름없는 몇 백리를 돌파해 패왕을 찾아왔으니 반갑고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계포에게는 그렇게 돌아온 것이 결코 자랑일 수만은 없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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