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윤평중]다시 기본을 생각하며

  • 입력 2006년 1월 3일 03시 03분


코멘트
새해를 맞아 우리는 웃는 얼굴로 덕담을 나눈다. 멋진 계획을 세우고 비장한 결심을 하기도 한다. 지난해보다는 더 나아지리라는 소박한 기대에서부터, 무언가 큰일을 이루는 출발점으로 새해 첫날을 소중히 기념하는 것이다. 세밑과 새해를 나누어 새해를 축하하는 오랜 풍습은 모든 것을 마멸시키는 시간의 풍화작용을 거부하는 분별(分別)의 몸짓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극적인 기복으로 점철되고 있는 한국현대사를 성찰하는 분별의 화두는 무엇인가?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성취했음에도 극심한 혼란과 갈등에 빠져 있는 우리 사회가 지금 필요로 하는 분별심은 정녕 무엇일까?

세계를 놀라게 한 초고속 압축성장은 온갖 문제들의 과대응축을 동반했다. 빛과 그림자가 분리될 수 없는 것처럼 우리의 성취와 질곡도 쉽게 나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인의 상징이 된 ‘빨리빨리’도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불과 한 세기 만에 이루어진 중세적 농경사회에서 현대공업사회로의 비약이나, 봉건왕정에서 자유민주주의로의 도약도 이런 집합 정서의 폭발적 분출 위에서 비로소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 열정과 역동성은 앞으로도 소중한 자산이 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열정에 찬 빨리빨리주의를 이성적 성찰과 차분한 숨고르기 작업으로 걸러야 할 결정적 전환점에 도달했다. 지난해 말 우리 사회를 통타(痛打)한 ‘황우석 사태’는 이 점에서 진정 의미심장한 사건이다. ‘희대의 과학사기극’으로 종결되어 가고 있기는 하지만 이 사태는 어떤 개인의 해프닝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황우석 영웅신화의 행로는 그것을 가능하게 한 우리 사회의 토양이 없었다면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이런 언명이 주요 당사자들의 엄중한 책임을 희석시키거나 면책시키는 것으로 읽혀서는 안 된다.

황우석 사태의 진정한 의미는 우리가 ‘기본으로 돌아가 작은 것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다원사회에 걸맞은 정명론(正名論)에 대한 성찰이 요구되는 것이다, 즉 과학자는 과학자다워야 하며 정치인은 정치인다워야 하고 언론인은 언론인의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이 당연한 원칙이 무너질 때 재앙은 불가피하다. 과학자가 책략가나 연예인으로 변신할 때 학문이 되겠는가? 정치인이 여유롭고 안정된 민생의 달성이라는 정치의 근본을 도외시하고 한탕주의적 대반전에 골몰할 때 보통사람들의 삶이 배겨 나겠는가? 언론이 군중 선동의 도구로 타락할 때 민주주의가 지탱될 수 있겠는가?

선진국 문턱에서 비틀거리고 있는 교착상태를 넘어 세계적 경쟁력을 확립하기 위해서도 무형의 인프라인 정직성과 합리성이라는 원칙의 중요성에 눈을 돌려야 할 때다.

감성적 개인들이 남용하는 ‘진정성’의 수사학과는 달리 사회적 차원의 정직성과 합리성은 성역 없는 상호 검증과 민주적 토론의 소산이다. 정직성과 합리성이라는 기본 가치가 부재한 사회가 선진화된 현대사회로 나아갈 수는 없다. 이런 기본적 가치는 일상의 전 영역에서 작은 것들을 치밀하게 실천함으로써만 비로소 구조화되는 사회적 자본이다. ‘빨리빨리’나 ‘대충대충’과는 정반대 지점에 있는 현대적 덕목인 것이다.

정신없는 질주 대신 진중히 뚜벅뚜벅 걷는 것이 혼(魂)이 있는 현대사회를 만든다. 황우석 사태가 생생하게 예증하듯 기본이 결여된 전문가나 작은 것에 소홀한 사람이 많으면 얼빠진 사회가 된다. 삶에서 기본이 되는 것들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그러나 작은 것들에의 성실함이 모여 비로소 큰 것을 이룬다. 궁극적으로 세상을 만드는 힘은 정직성과 합리성에 기초한 작은 것들의 실천에서 나오는 것이다.

윤평중 한신대 교수·사회철학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