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자주국방의 말 값’국민에게 던져지는 청구서

동아일보 입력 2005-11-08 03:02수정 2009-10-08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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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부가 한미 간의 신속한 군수(軍需) 지원을 위해 새 협정을 체결하자고 5개월 전 미국에 요청했으나 거부당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전쟁 발발에 대비한 한미 간 긴급 소요 부족품 목록(CRDL)은 지난해 말 폐기됐고 전쟁예비물자(WRSA) 계획은 내년 말 폐기될 예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의 새 협정 거부는 전쟁 초기 상황에 대한 책임과 부담을 한국이 전적으로 지라는 통고나 다름없다.

노무현 정부가 내세운 자주국방의 ‘말 값’이 하나둘씩 현실화되고 있는 것이다. CRDL과 WRSA는 대부분 전시(戰時)에 대비한 탄약이다. 그러나 현재 한국군이 보유한 탄약은 10여 일간 전쟁을 치를 수 있는 분량에 불과하다. 2020년까지로 추산되는 자주국방 예산 621조 원에 탄약 항목이 포함된 것도 아니다. 결국 정부는 별도 예산으로 전시 대비 탄약을 마련해야 한다.

정부가 5조 원대의 WRSA를 인수한다고 해도 미국이 또 다른 부담을 한국에 지우려고 할 가능성이 크다. 미국은 이미 2년 전 “유사시 한반도에 투입할 증원 전력(戰力) 규모를 재평가하겠다”고 한국에 통고했다. 동맹에서 갈수록 멀어지는 한국에 대해 미국이 더는 희생을 치를 필요가 없다는 판단이 행동으로 나타나는 양상이다. 미국의 ‘안보 우산’이 작아질 때 생기는 공백은 자주국방을 외쳐 온 정부가 메워야 하고, 그 청구서는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

정부의 기만적인 태도도 문제다. 본보가 4월 미국의 WRSA 폐기 방침을 보도하자 국방부는 “WRSA가 폐기돼도 유사시 한국군의 전쟁 수행 능력에 문제가 없다”고 호언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두 달 뒤 새 협정 체결을 미국에 요구했다. 국민에게는 안심하라고 하면서 뒷전으로는 미국에 매달리는 이중적인 행태는 안보 불안을 더욱 키운다.

노 정부는 실속 없는 자주국방 타령부터 중단하고 이완된 한미동맹을 서둘러 재정비해야 한다. 이대로 가다가는 안보는 안보대로 취약해지면서 국민 허리만 더 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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