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권순활]입 다문 경제연구소들

  • 입력 2005년 10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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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어느 국책 경제연구소에서 있었던 일이다.

출자총액제한제도가 기업 투자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한 보고서가 ‘공개 불가(不可)’ 결정을 받았다. 정부 주장과 달리 투자에 악영향을 준다는 결론이 나왔기 때문이다. 자료 수집과 검증에 공을 들인 연구진은 지금도 허탈해한다.

이런 모습은 요즘 대부분의 국책 연구기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정부에 부담이 될 것 같은 보고서가 햇빛을 보지 못한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다. 캐비닛에 들어 있는 미공개 보고서일수록 ‘물건’이 많다는 말도 들린다.

이렇다 보니 외부에 발표되는 것은 대부분 정부 입맛에 맞는 관변(官邊) 어용논리거나 ‘물에 물 탄 듯한’ 내용이다. 좀 민감한 문제라면 아예 연구 테마에서 제외된다. 세상에 ‘헛품’ 팔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민간 연구소도 사정은 비슷하다.

경제 전문가들을 만나 보면 우리 경제의 발목을 잡는 핵심 변수는 ‘순수 경제요인’이 아니라고 말한다. ‘시대착오적 코드’와 관련되는 정치·사회적 혼돈을 성장잠재력 추락의 뿌리로 꼽는다. 그렇지 않고는 거의 모든 연구기관의 당초 전망치보다 3년 연속 성장률이 낮은 우울한 현실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전망은 전망일 뿐이라지만 경제연구소라면 박사가 널려 있는 곳이다.

하지만 어느 연구기관도 이런 변수를 언급하지 못한다. 언론의 취재에도 극도로 말조심을 한다. ‘힘 있는 분’들의 심기를 거슬렀다가 유무형의 불이익을 당할 것을 겁내기 때문이다. 기자들에게 “신문에 내 이름이 나올 때는 미리 알려 달라”는 사람도 많다. ‘위에 보고도 해야 하고 귀찮은 일도 많기 때문’이란다.

해외에서조차 우리 경제를 짓누르는 경제 외적 위험성을 경고하는 목소리가 커진다. 하지만 국내에서 자기 이름 내놓고 이를 지적하는 사람은 ‘찍힐 각오’를 한 일부 교수 언론인 법조인 정도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13일 내놓은 내년 경제전망 보고서에서 재정지출 억제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어떤 항목을 줄여야 할지에 대해선 “우리는 대차대조표를 볼 뿐이어서 뭐라 말하기 어렵다”며 비켜나갔다. 비단 KDI뿐 아니라 여러 연구소에서 나오는 두꺼운 보고서를 다 훑어봐도 신발을 신고 발바닥을 긁는 격화소양(隔靴搔양)의 답답함을 느낀다.

경제연구소들의 침묵은 책임자 인선과도 무관하지 않다. 현재 정부 출연(出捐) 연구기관장의 압도적 다수는 청와대나 여당, 행정부와 이런저런 인연을 맺은 사람이다.

정부는 민주적 절차에 따라 능력 있는 인사를 선임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런 설명을 수긍하는 사람은 찾기 힘들다. ‘쓴소리’를 하면 있는 자리조차 보전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책 연구소를 ‘정권의 참모기관’쯤으로 여기거나 권력 풍향(風向)에 따라 알아서 납작 엎드리는 사람들로 채운다는 비판도 적지않다.

국책 및 민간 경제연구소는 교수 사회와 함께 경제 전문가 그룹의 양대 축이다. 학자의 양심과 전문성을 토대로 경제의 오늘과 내일을 짚어 주는 나침반 역할을 해야 한다. 이런 중요한 기관이 일일이 정부 눈치를 보면서 몸 사리기와 자기 검열에 얽매인 현실을 어떻게 봐야 할까. ‘침묵의 나선형’이 드리울 그늘이 두렵다.

권순활 경제부 차장 shkw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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