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491>卷六. 동트기 전

  • 입력 2005년 6월 23일 03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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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초나라 군사들이 거칠게 몰아대자 기신을 따라 병장기도 들지 않고 항복해 온 한군(漢軍)들이 갑자기 갑옷과 투구를 벗어던지고 슬피 울어댔다. 초나라 군사들이 어리둥절해 살펴보니 기신을 따라 항복해 온 한군 2000명은 모두가 여자였다. 그 일을 전해들은 패왕 항우는 화가 꼭뒤까지 치솟았다.

“이건 또 무슨 수작이냐?”

속으로 짐작 가는 바가 있으면서도 위사(衛士)들에게 끌려온 기신을 무서운 눈길로 노려보며 그렇게 물었다. 기신이 한층 느긋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 가여운 여인네들을 물으시는 것이오? 저들을 군사들처럼 꾸며 성 밖으로 끌어낸 것은, 대왕의 눈을 속임과 아울러 먹을 것이 모자라는 성 안에서 싸우지도 못하면서 먹을 것만 축내는 입을 줄여주려 함이었소이다. 남자들은 형양성 안에 남아 우리 대왕이 돌아오실 때까지 싸우면서 성을 지켜야지요.”

“그럼 남아서 지키기로 한 것은 누구누구냐?”

“이도 군진(軍陣)의 일이라 함부로 밝혀서는 아니 되지만 대왕께서 물으시니 알려드리겠소이다. 어사대부 주가(周苛)와 종공, 한왕 신과 위왕 표 넷이서 우리대왕께서 돌아올 때까지 형양성을 지키게 될 것이오.”

그러자 무엇 때문인지 패왕이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가 되어 물었다.

“위왕 표와 한왕 신은 과인이 안다. 그런데 주가와 종공은 어떤 자들이냐?”

“성현의 가르침에 따라 임금을 섬기고 백성들을 보살피는 떳떳한 선비들이오.”

기신이 그렇게 거침없이 대답했다.

“유가(儒家)의 무리로구나. 그래 너와는 어떤 사이냐?”

“주가와는 한 스승에게서 배운 동문(同門)이요, 함께 대말을 타고 놀던 어릴 적부터의 벗(竹馬故友)이외다.”

이번에도 기신은 자랑처럼 거침없이 대답했다. 항우가 한층 목소리를 부드럽게 해 그런 기신을 달래듯 말했다.

“위왕 표는 전에 제 발로 과인을 찾아와 항복한 적이 있고, 한왕 신도 형세가 다급해지면 과인의 뜻을 따를 것이다. 그런데 네가 주가와 그리 가깝다니 주가는 네가 한번 달래볼 수 있겠구나. 어떠냐? 주가를 달래 과인에게 형양성을 바치도록 할 수는 없겠느냐? 그렇게만 해주면 네가 과인을 속이고 한왕 유방을 빼돌린 죄를 용서하고 상장군으로 써주겠다.”

그러자 기신이 하늘을 쳐다보고 껄껄 웃다가 갑자기 사나운 눈길로 패왕을 노려보며 꾸짖었다.

“이놈 항적(項籍)아. 네 아무리 어리석고 미련하기로서니 어찌 그리도 나를 작게 보느냐? 다시 말하거니와 군자는 죽일지언정 욕보이는 법은 아니라고 했다. 우리 대왕의 수레를 빌려 탈 때부터 이 목숨은 이미 충의에 바친 것인데, 이제 다시 그 목숨을 아껴 구차한 말이나 글로 오랜 벗의 눈과 귀를 더럽히란 말이냐?”

그 말에 억누르고 있던 화가 일시에 솟구치는지 패왕의 낯빛이 홱 변했다. 칼자루를 움켜잡으며 다시 범 울음소리를 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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