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칼럼/유홍림]국수주의와 보편가치

  • 입력 2005년 3월 31일 19시 2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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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우익의 언행이 심상치 않다. 그들은 치밀한 계획과 도발적 언행을 교묘하게 결합해 주변국들을 긴장시킨다. 한국정부는 일본의 저의를 ‘국가이익’의 관점에서 파악하고 다각도의 대책 마련과 범정부적 전담기구 설치를 서두르고 있다. 그런데 국제관계는 손익계산뿐만 아니라 심리적 대결을 축으로 한다. 상대의 심리구조를 잘 파악해야만 효과적인 대책을 준비할 수 있다.

일본의 국수주의(國粹主義)는 사회경제적 배경이나 물질적 이해관계로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 심리구조를 갖는다. ‘일본 학계의 천황’으로 알려진 마루야마 마사오 씨는 1946년 ‘초(超)국가주의의 논리와 심리’라는 글에서 당시 일본의 ‘정신상황’을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메이지 유신과 함께 정신적 권위인 ‘천황’을 중심으로 다원적 정치세력들이 일원화됐다. 이 과정에서 서구의 경우와 달리 개인의 도덕적 주체성은 제대로 확보되지 못했다. 개인의 자율적인 판단은 ‘양심’에 근거해야 하는데 국가가 윤리 규정을 독점하고 시비와 선악의 기준을 제공했다. ‘신민(臣民)의 도’를 실천하고 천황에게 귀일하여 국가에 봉사한다는 이데올로기는 일본의 국가구조에 깊이 심어졌다.

▼권력과 윤리의 결합이 국수주의▼

당시 일본인들은 ‘진선미의 극치’인 일본제국이 본질적으로 악을 행할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에 국가의 모든 행위를 용인했다. ‘대의(大義)’와 국가가 일치되면서 국가 행위에 대한 비판과 반성은 불가능해졌다. 개인의 내면적 윤리는 무력하기 때문에 무가치한 것으로 간주됐고, 윤리가 실천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국가권력과 결합돼야 한다는 논리를 낳았다. 물론 이러한 논리는 국제관계에서 가장 큰 힘을 발휘했다. 정치는 비도덕적이고 잔인한 것이라는 현실주의적 인식보다 더 무서운 것은 권력과 윤리가 결합돼 자비로운 행위와 잔혹한 행위가 구분되지 않는 상황이다.

이러한 ‘정신상황’을 먼 과거에 대한 묘사로 간과해버릴 일이 아니다. 사회경제적 조건의 변화에 비해 심리구조나 편견은 오래 유지된다. 마루야마 씨의 분석이 옳다면 국수주의의 심리구조에는 국가를 초월한 보편윤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일본 우익은 보편가치를 체득하지 못했고, 따라서 그들에게는 생소한 관념이다. 과거에 대한 진정한 반성은 국가와 윤리 기준이 분리돼야 가능하다. 일본 우익이 ‘반성’을 ‘자학’으로 여기는 이유를 간파해야 한다.

일본은 유엔 헌장에 담긴 보편가치의 실현을 위해서가 아니라 ‘실력’에 근거한 국제적 위상 확보를 위해 유엔 안보리에 진출하려 한다. 또한 ‘신헌법 초안’은 집단자위권과 군대의 명문화뿐만 아니라 정교(政敎)분리의 완화조치를 포함하고 있다. 나아가 ‘천황’을 ‘국가원수’로 명시하는 방안도 검토되고 있다.

일본 우익에게 국체(國體)는 그들의 정신이다. 헌법 개정을 통해 천황과 신사참배의 의미를 부활시키려는 그들의 집요함에서 국수주의의 심리구조를 새삼 발견한다.

패권국가의 등장에 의해 국제적 보편가치는 무력해질 수 있다. 그러나 보편가치는 현실 판단과 정당화에 필요한 기준이다. 전쟁의 정당성을 대내외적으로 인정받기 위해 노력하는 미국을 보라. 정의는 군사작전의 방향을 바꾸기도 하는 실제적 힘이다. 일본 우익이 그에 대해 무방비 상태이기 때문에 회피하는 대상이 바로 국제정의와 평화라는 보편가치다. 기껏 그들이 의존하는 사이비 국제규범은 과거 제국주의시대 열강들 간에 이루어진 타협이다.

▼보편가치는 현실적인 공존법칙▼

보편가치에 호소하는 방식을 ‘실력’이 약한 국가가 선택하는 소극적 전략으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 물론 인권, 평화, 정의 등의 보편가치는 종종 ‘패권적 강압의 빌미’ 또는 반대로 ‘약자의 도덕적 무기’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보편가치를 단순히 이데올로기적 수단으로 치부하는 현실주의에 동조하는 순간 국수주의는 고삐에서 풀려날 것이다. 보편가치는 전쟁과 억압의 경험에 대한 진지한 반성을 통해 어렵게 획득된 인류 전체의 공존법칙이다. 보편가치를 같이 인정하고 나눌 수 있는 국제적 연대 구축이 시급하다.

유홍림 객원논설위원·서울대 교수·정치학 honglim@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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