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호 칼럼]‘난타’의 예술, 난타의 정치

  • 입력 2004년 11월 17일 19시 06분


코멘트
우리 대통령은 말을 잘한다. 국무총리도 말을 아주 잘한다. 나는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정치인들도, 특히 386세대라는 젊은 정치인들은 여야, 보혁 가릴 것 없이 두루 말을 잘한다. 우리가 요즈음 노상 듣고 보는 것처럼.

언제부터 우리나라의 대통령이 저렇게 말을 잘하게 됐을까. 말끝마다 “그러니까 말여…” 하던 김대중 전 대통령, “학실히 버르장머리를…” 하던 김영삼 전 대통령까지도 말이 어눌했다. 18년 장기 집권했던 무서운 대통령은 심기가 불편하면 말을 못한 게 아니라 아예 말을 안 함으로써 더욱 무서운 대통령으로 군림했다.

측근들에게까지 곧잘 친필 서찰을 적어 보낸 박정희, 국내외에서 저서를 간행한 김대중 전 대통령까지는 ‘구텐베르크시대’, 인쇄문화의 시대, ‘글의 시대’의 대통령이었다. 그에 비해 노무현 대통령은 ‘맥루한의 시대’, TV와 인터넷의 시대, ‘말의 시대’가 배출한 첫 대통령이라 할 수 있다. 말을 잘할 수밖에.

하지만 ‘말을 잘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아니 그보다 도대체 ‘잘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말을 잘한다고 할 때의 ‘잘’과 글을 잘 쓴다고 할 때의 ‘잘’은 같은 의미일까.

‘용사마’ 배용준은 ‘잘’ 생겼다. 그건 누구에게나 호감이 가도록 준수하게 생겼다는 좋은 뜻이다. 그러나 여자는 ‘잘’ 운다고 할 때 그건 모든 여자가 아름답게 운다는 뜻일까. ‘겨울 연가’의 최지우처럼 만인의 눈물샘을 자극하며 기품 있게 운다는 뜻일까. 한국 관리들은 뇌물을 ‘잘’ 먹는다고 하면 그들이 고운 입 모양으로 매너도 아름답게 뇌물을 먹는다는 뜻일까.

말을 삼가라는 신언(愼言)의 어훈(語訓)이 살아 있던 전통사회에서는 말을 잘한다는 게 자랑이 아니었다. 군자는 오히려 말이 서툴기를 바란다(君子欲訥於言)고 가르쳤다. 그래서 점잖은 이몽룡이 춘향의 집을 찾아가선 ‘앉고 보니 별로 할 말이 없고 공연히 기침 기운이 나서’ 헛기침만 하는 어눌한 도령으로 형상화됐고, 그 대신 심봉사를 등쳐먹은 천하에 몹쓸 뺑덕어멈은 ‘일년 삼백육십오일 입 잠시 안 놀리고는 못 견디는’ 말 잘하는 인물로 정형화해 놓았다.

물론 ‘말을 잘한다’고 해서 뺑덕어멈이 우리 대통령처럼 말한다거나 우리 국무총리가 뺑덕어멈처럼 말한다고 모함할 생각은 전혀 없다. 서로가 서로를 헐뜯고, 말로 치고 패고, 의정 단상으로 서류와 책과 심지어 구두짝까지 내던지는 ‘난타의 문화’ ‘난타의 정치’에 이 사람까지 가세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여기선 말을 잘한다는 것엔 두 가지 뜻이 있음을 밝혀 두고자 하는 것이다. 공자는 고향 사람들과 있을 때엔 말 못하는 사람처럼(似不能言者) 보였으나 조정에 나가면 말이 거침없고 다만 삼갈 따름이었다는 것이다. 말을 ‘잘’ 하지만 평소엔 말을 ‘잘’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말의 문화가 가장 먼저 꽃핀 영국 의회에서도 청산유수로 말을 하면 사려 깊지 못한 사람처럼 보일까 보아 영국 국회의원들은 일부러 말을 더듬는다는 유명한 얘기가 있다. 동북아 문화권에선 더욱이 말 잘한다는 게 자랑이 아니요, 말을 잘 못하는 것이 별 흉이 아니었다. 일본은 메이지(明治)유신 이후 100년이 지난 뒤에도 ‘일본 외교에서의 침묵의 의미’란 연구논문을 세상에 내놓고 있다.

‘난타’가 세계 도처에서 선풍을 일으키고 있다. 한편 베를린의 국립 가극장에서 일본의 작곡가 다케미쓰 도루의 작품들을 짜깁기해 ‘작곡하지 않은 오페라’를 ‘마이 웨이 오브 라이프’란 제목으로 그곳 극장장이 연출하여 공연하는 걸 지난달 구경했다. 최소한의 음향과 최소한의 연기로 이뤄진 오페라. 현지 언론은 그걸 ‘고요함의 소리’를 들려주는 작품이라 호평하고 있었다.

우리가 언제부터 이렇게 말 잘하는 국민이 되었는지, 언제부터 저런 ‘난타의 문화’에, ‘난타의 정치’에 익숙한 국민이 되었는지…. 아니. 그게 도대체 ‘우리’인가? 맞는 얘기인가?

최정호 객원大記者·울산대 석좌교수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