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306>卷四. 흙먼지말아 일으키며

  • 입력 2004년 11월 14일 18시 0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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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말만 번지르르하고 처신은 반복 무쌍한 유자(儒者)구려. 오늘은 과인에게로 왔으나 내일은 어디로 갈지 누가 알겠소?”

한왕이 별로 반갑잖은 기색으로 그렇게 한신의 말을 받았다. 한왕이 그렇게 말한 것은 숙손통과 헤어진 뒤에 들은 마뜩찮은 후문(後聞)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미 전설이 되어 산동(山東)을 떠도는 숙손통의 전력(前歷)도 한왕은 못마땅하게 여겼다.

숙손통은 설(薛) 땅 사람으로 학문이 뛰어났는데, 진나라 말기 조정에 불려가 박사(博士=史實 기록과 서적을 관장하는 벼슬아치)를 바라며 벼슬살이를 시작했다. 몇 년 뒤 진승이 산동에서 군사를 일으키자 이세 황제가 당시의 박사와 여러 선비들을 불러놓고 물었다.

“초나라에서 수자리 서던 병사들이 기현((근,기)縣)을 공격하고 진(陳) 땅에 이르렀다 하니 경들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신하된 자는 반역의 마음을 품어서는 아니 됩니다. 반역의 마음을 품었다는 것이 벌써 반역을 저지른 것이니, 이는 죽어 마땅한 죄로서 용서할 수 없습니다. 폐하께서는 급히 군사를 내어 그들을 치시어 천자의 위엄을 보이셔야 합니다.”

눈치 없는 박사와 서른 명이 넘는 선비들이 아첨삼아 그렇게 대답했다. 그러나 이세 황제는 그 말을 듣고 성이 나서 안색이 홱 변했다. 그걸 본 숙손통이 얼른 앞으로 나가 말했다.

“여러 선비들의 말은 다 틀렸습니다. 오늘날 천하는 통일되어 한 집안처럼 되었고, 여러 군(郡)과 현(縣)은 성벽을 허물어 앞으로는 거기 의지해 싸우는 일이 없으리라는 뜻을 밝혔으며, 나라는 모든 무기를 녹여 다시는 그걸 쓰지 않겠다는 뜻을 널리 보여주었습니다. 또한 위로는 영명하신 황제께서 계시고, 아래로는 제도와 법령이 완비되어, 백성들은 저마다 생업에 충실하며 삶을 풍족하게 가꿔가고 있는데, 누가 감히 반역을 꾀하겠습니까? 방금 폐하께서 말씀하신 무리는 좀도둑 떼로서, 쥐새끼가 곡식을 훔치고 개가 물건을 물어가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제 군수(郡守)들과 군위(郡尉)들이 그들을 잡아들여 죄를 다스리고 있으니 조금도 걱정하실 일이 아닙니다.”

그러자 이세 황제의 얼굴이 활짝 펴지며 다시 다른 선비들에게 같은 일을 물었다. 어떤 선비는 정말로 반란이 일어난 것이라 하고, 어떤 선비는 도적 떼일 뿐이라고 대답했다. 다 듣고 난 이세 황제는 어사(御使)를 불러 반란이 일어난 것이라고 말한 선비들은 모두 형리(刑吏)에게 넘기도록 하였다. 말해서는 안 될 것을 말했다는 죄목이었다.

한편 진승의 무리가 좀도둑 떼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 사람들은 모두 일없이 풀려났는데, 특히 숙손통은 비단 스무 필과 옷 한 벌을 하사받고 그날로 박사가 되었다. 숙손통이 궁궐에서 물러나 숙소로 돌아가자 소문을 들은 선비들이 몰려와 그를 나무라며 물었다.

“선생께서는 어찌 그렇게 아첨하는 말을 하여 다른 선비들을 어렵게 만들었소?”

그러자 숙손통이 깊은 한숨과 함께 말하였다.

“그대들은 모르오. 나는 오늘 하마터면 범의 아가리를 벗어나지 못할 뻔하였소!”

그리고는 그날 밤으로 짐을 싸서 고향인 설 땅으로 달아났다가, 때마침 그곳으로 진격해온 항량을 따르게 되었다. 사람들은 대개 그렇게 이세 황제에게서 빠져나온 숙손통의 기지를 높이 쳤다. 그러나 한왕은 왠지 그게 유자들을 못미덥게 하는 나약과 비굴의 전형 같았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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