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언대]황평우/日帝의 도성파괴 상징물 놔둘건가

  • 입력 2004년 8월 24일 19시 1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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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평우
이 땅에는 1300개가 넘는 성(城)이 존재했다. 성은 백성의 안정과 평안을 유지하고, 고대 물자 수송의 핵심인 수로를 지키는 중요한 거점이었다. 성 중에서 가장 발달된 형태가 도성(都城)인데, 수원 화성과 서울 도성이 이에 해당한다. 도성은 당대의 정신적 총화라고도 할 수 있다.

경쟁의 승자는 상대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상징물을 철저하게 훼손한다. 일본제국주의가 우리에게 그랬다. 서울 도성은 1900년 7월 숭례문 북쪽 성벽의 철거가 시작됐고, 그 뒤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교통에 장애가 된다는 이유 등으로 대부분 훼손됐다.

일부가 파괴를 면했지만 그 이유가 비극적이다. 나중에 제2대 조선총독으로 악명을 떨친 하세가와 요시미치는 1904년 9월부터 1908년 11월까지 조선군 사령관으로 있으면서 숭례문 철거를 주장했다. 그러나 숭례문과 흥인지문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두 선봉장인 가토 기요마사와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들 문을 통해 입성해 서울을 함락시킨 ‘자랑스러운’ 전승기념물이라는 반론이 나와 보존키로 결정됐다. 그에 반해 서대문(돈화문) 등은 그런 연고가 없어 완전 철거됐다. 평양성의 현무문과 칠성문, 보통문, 모란대, 을밀대, 만수대 등이 고적으로 보호된 것도 청일전쟁 때 일본군의 승리와 관련된 전승기념물들이기 때문이다.

일제에 의해 파괴된 성곽 위에는 새 건축물이 들어섰고, 그 건축물은 광복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아무 문제의식 없이 사용되고 있다. 1940년 혜화문 옆의 도성 위에 일본인이 지은 건물은 지금 서울시장 공관으로 쓰인다. 서울의 수치가 아닐 수 없다.

서울시는 아차산 유적 복원을 말하고 있다. 그것도 좋지만 일제의 서울 도성파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시장 공관을 그대로 둘 것인지의 여부도 관심을 갖고 고민해볼 일이다.

황평우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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