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899년 호르헤 보르헤스 출생

  • 입력 2004년 8월 23일 18시 4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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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생 비밀스러운 작가였다. 사람들이 내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나는 쉰 살이 넘어 있었다. 명성은 마치 실명(失明)처럼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여름날의 느릿느릿한 석양(夕陽)처럼 말이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이 아르헨티나 태생의 작가는 1961년 부조리의 극작가 사뮈엘 베케트와 함께 ‘포멘터 상’을 수상하기까지 스페인어권에서도 거의 무명이었다.

그러나 그의 시와 소설은 남미대륙을 벗어나자 세계문학의 거대한 봉우리로 솟구친다.

보르헤스는 20세기를 마감하면서 현대소설의 새 장을 열었다. “20세기 문학의 스승”(존 바스)이었다.

‘마술적 리얼리즘’은 주변에 머물러 있던 라틴문학을 세계문학의 주류로 등단시켰다. ‘보르헤스적’은 ‘환상적’ 또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동의어가 된다.

그가 빚어낸 ‘악몽의 세계’는 카프카의 ‘변신(變身)’이었다.

그의 문학은 가브리엘 마르케스, 파블로 네루다, 옥타비오 파스 등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중남미 거장들의 정신적 젖줄이요 창작의 원천이다.

마르케스의 단편엔 이런 일화가 나온다.

낮잠에서 깨어난 네루다가 외쳤다. “어떤 여자가 나에 대해 꿈을 꾸는 꿈을 꾸었어!”

마르케스가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그건 이미 보르헤스가 쓴 얘기야. 아직 안 썼다면 언젠가 쓸 게 틀림없어!”

그의 대표적 단편 ‘끝없이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은 소설 속에 소설이 있을 뿐 아니라 한 이야기가 여러 이야기로 번져 나가는 신비로운 독서체험으로 이끈다.

시간(時間)의 ‘자기 복제’와 ‘무한 증식’을 통해 기상천외한 지적 미로의 한복판으로 밀어 넣는다. 그는 미궁(迷宮)의 신이다.

그는 불가지론자다. “모든 형이상학은 환상문학이다.”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논리적 사고체계의 현실을 거부했다. 현실은 단지 ‘거울’이다. “거울은 자신의 현란한 거미줄에/이 모호하고 덧없는 세계를 연장시키네….”

보르헤스는 나이 서른에 서서히 시력을 잃기 시작해 50세에 이르러 맹인작가가 되었다. “책과 밤을 동시에 주신 신의 경이로운 아이러니!”(‘축복의 시’)

그는 매번 노벨문학상 후보에 올랐으나 끝내 상을 받지 못하고 87세 되던 해에 숨졌다. 여비서와 재혼한 지 두 달 만이었다.

“내가 어떤 사람의 꿈을 꾸었는데 나 역시 타인의 꿈은 아닐까….”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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