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딸의 숙제와 ‘48년 체제’

  • 입력 2004년 7월 27일 18시 33분


“아빠, ‘동백림(東伯林) 사건’이 뭐예요?”

어느 날 저녁 고교 1학년에 재학 중인 딸이 느닷없이 물었다.

“갑자기 왜 그 사건이 궁금해졌니.”

“학교 숙제예요. 수행평가로 성적에도 반영돼요.”

한국 현대사의 민감한 사건에 대한 아빠의 명쾌한 설명을 기다리는 딸을 앞에 두고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여고 1학년의 수행평가 과제로는 다소 부적절한 것 같구나. 혹 다른 과제는 내주시지 않던….”

“아 예, 있어요.”

다행이다 싶어 딸의 수첩을 들여다봤더니 더 깜짝 놀랄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제주4·3항쟁’ ‘반민특위’ ‘거창 양민학살 사건’ ‘진보당 사건’ ‘베트남전쟁과 한국’ ‘인혁당 사건’ 등 13개 수행과제가 빼곡히 적혀 있었던 것이다. 담당 과목 선생님이 학생들이 좋아하는 실력 있는 교사라는 얘기를 듣고는 더욱 고민에 빠졌다.

교과과정에도 없는 내용을 과제로 내준 담당교사의 ‘의도’와 이런 사실을 모르고 있을 학교 당국의 ‘무신경’이 두렵고 원망스러웠다. 고교 시절 편향적 ‘유신 옹호 교육’에 염증을 느꼈던 아빠는 꼭 30년 뒤 딸이 받고 있는 ‘의식화 교육’도 같은 이유로 혐오한다. 하지만 딸의 ‘원만한 교내 생활’을 염려해 항의 한번 못 했다.

최근 우연히 듣게 된 ‘2008년, 건국 60주년-48년 체제 청산설’은 더욱 심란하다. 1948년 남한 단독으로 실시된 총선거로 탄생한 대한민국은 태어나지 않았어야 할 친미(親美) 정권으로, 이로 인해 분단이 고착화되고 군부 쿠데타가 이어져 현대사가 오욕으로 점철됐으므로 건국 60년이 되는 2008년에 기필코 이 체제를 청산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한민국 국민은 지난 50년간 도대체 무엇을 위해 존재했다는 말인가.

구체적인 실천 방안은 국호(國號)인 ‘대한민국’과 국기(國旗)인 ‘태극기’, 국가(國歌)인 ‘애국가’ 등 국가 상징물의 교체. 현 지배층이 그처럼 수도 이전에 집착하고, 일각에서 ‘서울대 폐지’와 ‘국내 박사 채용 할당제’를 거론하는 것도 ‘48년 체제’ 청산을 위한 정지작업의 일환이라는 얘기까지 들린다.

‘48년 체제’ 청산설의 실체와 실현 가능성에 대해서는 물론 적잖은 논란과 회의가 있다. 하지만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언제나 ‘침묵의 다수’가 아닌 ‘뭉쳐 있는 소수’였다. 또 ‘세상을 유지하는 것은 일류지만, 세상을 바꾸는 것은 삼류’인 것을 감안하면 전혀 불가능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공교롭게도 2008년은 새 대통령과 국회가 출범하는 해다.

대학 3년 때인 1980년 ‘전두환 장군’ 체제가 들어서는 것을 목도하면서 현실 도피성 해외 유학을 결심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아빠. 어느덧 50대 가장이 돼 이제 나라의 정체성에 대한 회의로 이민을 생각해 보지만 그마저 여의치 않다.

아빠는 다만 간절히 소망한다. 여고생 딸의 사회 숙제가 좀 더 가치중립적이고 미래지향적이기를, 그리고 서울올림픽이 열리던 자랑스러운 해에 태어난 딸애가 2008년에도 수도 서울에서 태극기를 휘날리며 “대∼한민국”과 애국가를 힘차게 외칠 수 있기를….

오명철논설위원 oscar@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