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만들어진 전통’…서구 근대전통은 ‘발명품’

  • 입력 2004년 7월 16일 17시 25분


19세기 중반 나폴레옹 3세는 권력을 잡은 뒤 새로운 파리를 구상했고 그 꿈은 조르주 외젠 오스만 남작에 의해 실현됐다.오스만남작은 복잡하게 얽힌 낡은 구역을 제거하고 개선문을 중심으로 햇살처럼 뻗은 12개의 도로로 나폴레옹의 야심을 담은 새로운 전통을 이 도시에 부여했다.(왼쪽사진)1903년 인도 델리에서는 빅토리아 여왕의 뒤를 이은 에드워드 7세의 알현식 겸 인도 황제 선포식이 거행됐다. 6개월간의 준비를 거쳐 마련된 이 행사는 인도에 대한 대영제국의 권위를 천명하기 위한 전형적 ‘전통 만들기’였다.사진제공 휴머니스트
19세기 중반 나폴레옹 3세는 권력을 잡은 뒤 새로운 파리를 구상했고 그 꿈은 조르주 외젠 오스만 남작에 의해 실현됐다.오스만남작은 복잡하게 얽힌 낡은 구역을 제거하고 개선문을 중심으로 햇살처럼 뻗은 12개의 도로로 나폴레옹의 야심을 담은 새로운 전통을 이 도시에 부여했다.(왼쪽사진)1903년 인도 델리에서는 빅토리아 여왕의 뒤를 이은 에드워드 7세의 알현식 겸 인도 황제 선포식이 거행됐다. 6개월간의 준비를 거쳐 마련된 이 행사는 인도에 대한 대영제국의 권위를 천명하기 위한 전형적 ‘전통 만들기’였다.사진제공 휴머니스트

◇만들어진 전통/에릭 홉스봄 외 지음 박지향 장문석 옮김/592쪽 2만5000원 휴머니스트

영국 지배 하에 있던 인도의 수도 델리에서 1877년 1월 1일 제국회의가 열렸다. 인도의 영국정부 수반인 부왕(副王·viceroy) 리튼 경이 델리역에 도착하면서 회의가 공식적으로 시작됐다. 리튼 경 부부는 열차에서 내려 인도의 지도층들과 인사를 나눈 뒤 인도에서 가장 크다고 알려진 코끼리 위의 가마에 올라탔다. 이들 일행은 인도인과 영국인으로 구성된 병사들의 사열과 운집한 군중의 행렬을 지나 3시간 만에 회의장에 입장했다.

야외에 마련된 거대한 회의장에는 토후(土侯)들이 모두 정해진 구역에 앉아 있었고 객석에도 관중이 가득 찼다. 리튼 경은 국가(國歌) 연주에 맞춰 연단에 올라 참모와 가족들을 대동하고 자리에 앉았다. 연단을 중심으로 반원형으로 대형 천막이 둘러쳐 있었고 그 천막 안에는 인도의 토후와 족장, 인도의 영국정부 고위관리들이 자리를 잡았다. 이 거창한 회의에는 토후들의 수행원 2만5600명을 포함해 약 8만4000여명이 참석했다. 제국회의는 부왕의 연설과 부왕에 대한 알현식을 비롯해 약 2주간의 행사로 진행됐다.

인도에서 대영제국 지배의 ‘전통’을 세우기 위해 ‘연출’된 이 제국회의는 역사가들 사이에서 겉치레에 불과한 ‘어리석은 행위’였다고 평가된다. 그러나 이런 전통의 조작은 식민지였던 인도에서만 행해진 것은 아니었다. ‘천년의 전통’이라고 선전되는 대영제국 왕실의 거창한 의례들도 대부분 19세기 후반∼20세기 초에 ‘만들어진’ 것이다.

영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5명의 역사학자들과 함께 이 책에서 ‘전통’의 허구성을 파헤쳤다. “통상 낡은 것처럼 보이고 실제로 낡은 것이라고 주장되는 이른바 ‘전통’은 실상 그 기원을 따져 보면 극히 최근에 발명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영국에서는 1740년 ‘신이여 국왕을 보호하소서’를 세계 최초의 국가(國歌)로 정했고 프랑스에서는 1880년 ‘라 마르세예즈’를 국가로 지정했다. 1870∼1914년 사이에 태어난 ‘신생국’인 독일 이탈리아 일본 등도 대체로 영국식 모델에 기초해서 국기, 국가, 국경일을 제정했다. 저자들에 따르면 이런 것은 대부분 ‘국가’를 영원불멸한 것으로 위장하기 위해 ‘만들어진 전통’이다.

홉스봄에 따르면 새로운 ‘전통’은 특히 지난 200년 사이에 집중적으로 만들어졌다. 이는 이 시기에 사회적 변화가 극심했음을 보여준다. ‘전통’이란 새로운 상황에 처해서 낡은 것들을 활용해 현실의 안정과 공동체의 결속을 다지고자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들어진 전통’에 주목하는 이유에 대해 홉스봄은 “‘만들어진 전통’은 다른 방법으로는 마땅히 감지할 도리가 없는 문제들을 가리키는 중요한 지표가 되기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가령 독일민족주의가 고답적인 자유주의에서 새로운 제국주의적이고 팽창주의적인 패턴으로 변형된 과정을 알기 위해서는 당국이나 단체 대변인의 공식 진술을 보는 것보다 오히려 이 시기에 새로 만들어진 독일제국의 ‘전통’들을 보는 것이 더 도움이 된다는 지적이다.

김형찬기자 kh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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