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180>卷四. 흙먼지말아 일으키며

  • 입력 2004년 6월 16일 18시 4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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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王이 되어 (3)

“하지만 패공이 남정(南鄭)에 자리 잡으면 언제든 관중(關中) 한복판으로 머리를 내밀 수 있는 형국이 되오. 파촉(巴蜀) 한중(漢中)에서 힘을 길러 멍석 말듯 온 관중 땅을 휩쓸어버리면 그때는 어떻게 하시겠소?”

곁에 있던 범증이 의심쩍은 눈초리로 항백을 보며 그렇게 물었다. 항백이 미리 장량과 의논해 짜낸 계책을 제 혼자만의 헤아림인 양 말했다.

“그 일이라면 아부(亞父)께서 바라시는 바처럼 패공 유방을 죽여 없앤 것보다야 못하겠지만, 그런대로 쓸 만한 대비책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오?”

“패공이 함부로 딴마음을 먹지 못하게 관중에 겹겹이 울타리를 마련하는 것입니다. 장함은 진나라의 마지막 명장으로서 누구보다도 관중의 지리와 민심을 잘 압니다. 장함을 옹왕(雍王)으로 삼아 함양 서쪽의 땅을 베어주고 폐구(廢丘)에 도읍하게 하면, 그가 패공 유방에게서 관중을 지키는 첫 번째 든든한 울타리가 될 것입니다. 또 사마흔은 본시 역양(轢陽)의 옥연(獄椽)이었으나, 세상을 보는 눈이 밝고 병략과 책모가 뛰어난 사람으로 일찍이 무신군(武信君)의 곤경을 구해준 적도 있습니다. 그를 새왕(塞王)으로 삼아 함양 동쪽에서 하수(河水)에 이르는 땅을 봉지로 주고, 역양을 도읍으로 삼게 하면, 관중을 지키는 또 다른 든든한 울타리가 될 것입니다.

거기다가 도위(都尉) 동예는 장함으로 하여금 대왕께 항복하도록 권한 자로 역시 안목 있고 지모(智謀)가 넘치는 사람입니다. 그를 적왕(翟王)으로 삼고 상군(上郡)의 땅을 주어 고노(高奴)에 도읍하게 한다면 장함과 사마흔의 뒤를 든든하게 받쳐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 셋은 본시 진나라의 장수로 함께 대왕께 항복한 자들이라 생사고락도 함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에게 관중을 쪼개 맡겨놓으면 한 덩어리가 되어 유방으로부터 관중을 잘 지켜낼 것입니다.”

얼른 듣기에는 그럴듯하게 들리는 말이지만, 실은 장량의 차가운 살핌과 매서운 꾀가 어우러진 교묘한 계책이었다.

장함과 사마흔, 동예는 모두 진나라의 장수들로서, 비록 죄수나 노복들이 많았다고는 하지만 수십만의 관중 사람을 군사로 이끌고 함곡관을 나간 이들이었다. 그런데 그들 수십만은 모두 죽거나 산 채 땅에 묻히고 항우에게 항복해 목숨을 건진 그들 셋만 살아서 관중으로 돌아왔다. 그러지 않아도 그들을 바라보는 관중 사람들의 눈길이 험하기 짝이 없는데, 항우가 관중의 왕으로까지 세우게 되면 그 뒤가 어찌될지는 뻔했다. 특히 신안(新安)에서 생매장 당한 진나라 사졸들의 부모형제는 기회만 닿으면 그들 셋을 죽여 그 고기를 날로 씹으리라 별렀다. 말하자면 그들 셋을 관중의 왕으로 세우는 것은, 겉보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든든한 울타리를 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은 없는 것보다 못한 썩은 바자를 두르는 격이었다.

하지만 항백의 말을 들은 항우는 말할 것도 없고 범증까지도 그 그럴듯함에 넘어가고 말았다. 두 사람이 모두 고개를 끄덕여 항백의 말을 받아들이자 패공 유방과 더불어 관중의 세 왕까지 정해지고 말았다. 그러자 관중과 서초(西楚) 사이의 땅도 차례로 임자가 정해지기 시작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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