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94년 심슨 살인혐의로 체포

  • 입력 2004년 6월 16일 18시 4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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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낫 길티(Not Guilty)!”

미식축구의 전설적인 영웅 O J 심슨. 무죄평결이 내려지자 그는 오른손을 번쩍 쳐들고 배심원들을 향해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백인 아내와 그녀의 정부(情夫)를 살해한 혐의로 법정에 섰던 심슨. 그는 미국에서 ‘가장 흰 색깔을 가진’ 흑인이었다.

식당 웨이트리스 출신의 금발 미녀와 결혼하기 위해 3명의 자녀를 둔 흑인 조강지처를 버렸다. 보란 듯이 백인 거주지에 살며 백인 실업가들과 어울렸고, 백인 여성들과 데이트를 즐겼다.

그러나 정작 그를 살린 것은 그의 피부색이었으니!

재판과정에서 심슨의 무죄를 결정적으로 입증한 것은 바로 ‘LA 캅’이었다. 그의 집에서 피 묻은 장갑을 찾아냈으나 경찰은 이 움직일 수 없는 물증을 스스로 무력화시켰다.

살인사건 발생 닷새 뒤인 1994년 6월 17일. 도주하던 심슨이 고속도로 상에서 체포됐을 때만 해도 그의 ‘유죄’는 확실해 보였다.

그러나 피 묻은 장갑을 찾아낸 마크 퍼먼 형사의 흑인비하 발언을 담은 비디오가 공개되면서 상황은 급전된다. 퍼먼은 흑인을 경멸하는 ‘니거(nigger)’라는 표현을 30번이나 내뱉었다.

변호인단은 살인사건을 시종 인종문제로 몰고 갔다. “백인 형사가 흑인인 심슨을 매장시키기 위해 증거를 심어놓았다!”

‘로드니 킹’ 사건의 진원지인 LA 경찰의 업보랄까. 다른 유력한 물증들도 빛을 잃었다.

심슨의 알리바이는 거짓으로 드러났고, 무수히 발견된 혈흔들은 DNA 감정결과 그와 피살자의 것으로 확인됐는데도.

살인현장에서 발견된 혈흔이 심슨의 것이 아닐 확률은 ‘1억7000만분의 1’이었고, 심슨 집에서 발견된 혈흔이 피살된 아내의 것이 아닐 확률은 ‘97억분의 1’이었다.

배심원단도 심슨 편이었다. 배심원 12명 가운데 9명이 흑인이었으니.

9개월을 끌어온 재판은 무죄평결이 내려지는데 불과 4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뉴욕타임스는 이례적으로 “미국 사법 재판사에 오점을 남겼다”는 사설을 실었다. “재판에서 변호인단이 호소한 ‘인종카드’는 또 다른 편견이었다.”

TV를 지켜보던 빌 클린턴 대통령은 의미심장한 한 마디를 던졌다.

“미국인들은 피부색에 따라 세상을 다르게 보고 있다….”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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