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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4년 2월 16일 20시 1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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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철학자 해나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을 해부하면서 정치의 본질을 이렇게 규정한다. 인간은 무엇인가를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정치적 행위의 존재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절망적 상황에서도 새로운 시작의 희망은 있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모든 것이 종말에 도달한 것처럼 보일 때 비로소 시작의 싹을 뿌릴 수 있다는 ‘모순’은 정치의 본질이다.
▼'모순된 여론' 무엇을 뜻하나 ▼
정치의 모순이 전체주의 시대에만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민주화가 운명처럼 여겨지는 우리 시대에도 무엇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 줄 모르는 방향 상실감과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만연해 있지 않은가. 그 규모가 어떠하든 불법은 불법인데도 불법 대선자금의 규모가 10분의 1이면 도덕성은 마치 10배쯤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후안무치가 우리의 정치문화를 지배하고 있지 않은가. 정당과 정치인들 사이에서 비도덕적인 방식으로 벌어지고 있는 ‘도덕성 경쟁’에 신물이 날 정도로 우리의 정치는 절망적이다.
모든 것이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다고 생각할 때 사람들은 무엇을 보고 정치를 판단할까? 이런 관점에서 보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수수께끼처럼 보이는 여론조사 결과는 많은 것을 시사한다. 동아일보의 여론조사에 의하면 어느 정당 후보를 지지하는가를 묻는 질문에서 자칭 소수여당인 열린우리당이 거대야당인 한나라당을 상당히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다. 왜 유권자들은 지난 1년간 노무현 대통령의 국정운영을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신생 여당을 더욱 지지하는 것일까?
여론의 향방이 이처럼 모순적인 가장 커다란 이유는 바로 우리의 정치현실이 절망적이라는 보편적 인식에 있다. 열린우리당이 가장 높은 지지를 받는 것은 결코 이 당이 더 도덕적이어서도 아니고 더 개혁적이어서도 아니다. 절망에서 희망을 길어내는 정치의 이중성을 생각하면 이유는 어쩌면 지극히 간단하다.
정치적 현실이 절망적이면 절망적일수록 국민은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능동성’에 높은 점수를 주기 때문이다. 시대적 도전에 단순히 수동적으로 대응하여 과거의 세력관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반동적’ 태도는 국민의 눈에 부정적으로 비친다.
열린우리당은 단지 신생 정당이라는 이유로 변화의 새 물결을 주도하는 ‘능동적’ 세력으로 비치고,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기득권 유지에 골몰하는 ‘반동적’ 세력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물론 이것은 새로운 시작을 바라는 국민의 오인과 착각일 수도 있다.
모든 정당이 다가오는 총선에서 이러한 오인과 착각을 이용하려 하겠지만, 국민이 단순히 변화만을 원하는 것은 아니다. 국민의 대다수는 노무현 정부의 무방향 무능력 무책임을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가 바뀌기는 했지만 국가가 나아가야 할 비전이 제시되기는커녕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안과 이라크 파병 동의안처럼 국가 이익이 걸려 있는 중대 사안을 소신껏 처리할 수 있는 능력과 책임의식은 어디서도 보이지 않는다.
▼국민은 진정한 ‘능동적 세력’ 원해 ▼
모든 사람이 동의할 수 있는 비전을 제시하고 국민을 설득함으로써 그 비전을 책임 있게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을 구비할 때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새 시대가 열릴 수 있을 것이다.
대통령은 부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여당은 지지하는, 모순된 여론에 함축되어 있는 역설적 메시지는 분명하다. 국민은 4·15 총선에서 ‘진정한 능동적’ 세력을 선택할 것이다. 진보든 보수든 단순히 상대 당의 결함에 편승해 반사이익을 보려는 반동적 세력은 배척당하고, ‘이제는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줄 수 있는 정당만이 지지를 받을 것이다.
이진우 계명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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