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왕정치, 이승엽에게 축하 메세지

  • 입력 2003년 10월 3일 03시 3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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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축하합니다. ‘프레샤(부담감)’가 대단했을 텐데….”

일본 프로야구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의 오 사다하루(王貞治·63) 감독은 환한 얼굴로 ‘아시아 홈런 기록’의 주인공이 바뀐 것을 축하해주었다.

도쿄에서 태어난 화교 출신의 그는 1964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한 시즌 홈런 55개라는 아시아 최고기록을 세웠다. 전인미답의 길을 걸어본 그인지라 그간 이승엽의 심리적 부담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하는 것 같았다.

그는 종이와 볼펜을 내밀며 축하 사인을 부탁하자 “기왕이면 더 굵은 것으로 써주면 좋지 않겠느냐”고 했다. 굵은 매직펜을 건네주자 한자로 ‘축, 이승엽 선수 신기록 달성 왕정치’를 쓱쓱 써내려갔다. 그는 어쩌면 이 순간을 오랫동안 기다려 왔는지 모른다. 39년 동안이나 혼자 짊어지고 온 대기록의 무게에서 비로소 벗어났기 때문일까. 한국의 한 젊은 후배에게 보낼 축하 사인을 쓰는 그의 얼굴에선 홀가분함까지 느껴졌다.

2일 오 감독과 인터뷰를 하기 전 팀 홍보 담당자를 만나 ‘사인을 부탁하려 한다’고 하자 “글쎄요, 해줄지 모르겠군요. 그런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요”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려울 것이라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오 감독은 흔쾌하게 축하 사인을 해주었다. 신기록을 기쁜 마음으로 후배에게 내주는 ‘대인’의 풍모가 엿보였다.

벤치에서 그는 늘 표독스러울 만큼 딱딱한 표정이다. 그러나 이날만큼은 그런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타이틀을 넘긴 섭섭함 또한 없지 않을 터. 그러나 그의 얼굴엔 웃음이 가득했다. 마치 자신이 기록을 수립할 당시인 입단 6년차 스물네 살의 젊은 시절을 돌이켜보는 것 같았다.

사인을 끝낸 오 감독은 “이거, 워낙 악필이라서…”라며 미소와 함께 종이를 건넸다. 오 감독은 이승엽이 자신처럼 외다리 타법을 구사하는 데 대해서도 흥미를 나타냈다.

미국 메이저리그행 교섭이 진행 중이라는 소식을 전하자 “음, 올해 몇 살이라고 했지요. 스물일곱 살이라. 아직 젊으니까, 충분히 도전할 가치가 있습니다”라며 기대 섞인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승엽이 앞으로도 계속 기록을 만들어 나가기를 바란다는 그는 “대기록 작성 때는 주변에서 너무 시끄럽게 하면 힘들다”고 회고했다. 64년 신기록을 세울 때 자신의 경험 때문이었다.

당시까지 한 시즌 최다 홈런 기록은 52개. 그가 51호를 날린 것은 15경기를 남겨뒀을 때였다. 이때부터 언제 신기록이 나올지 온통 난리법석이었다. 타석에 들어서면 고의 볼넷이 이어졌다.

그러나 그는 용케도 부담감과 초조함을 극복해냈고 결국 종전 기록을 3개나 상회하는 대기록을 세우며 시즌을 마쳤다. 이후 그는 22년간 868개(미국의 행크 애런은 755개)의 홈런, 7경기 연속 홈런, 1경기 4홈런, 4연타석 홈런 등 숱한 기록을 만들며 홈런의 ‘살아 있는 전설’이 됐다. 오 감독과의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서는 기자 주위로 일본의 야구 기자들이 다가왔다. 닛칸스포츠의 한 기자는 “11월 삿포로에서 열리는 아시아선수권대회를 취재하는데 거기에서 이승엽 선수의 모습을 보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승엽은 이제 한국 프로야구만의 이승엽이 아니다. 일본 언론도 신기록 달성을 앞두고 이승엽 관련 소식을 전했다. 요미우리신문은 최근 이승엽의 활약상을 사진을 곁들여 크게 보도했다. 오 감독의 외다리 타법을 연상시키는 타법으로 아시아 신기록 달성을 눈앞에 두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도쿄=조헌주특파원 hans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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