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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3년 8월 29일 18시 5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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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의 새 소설집 ‘엘리아의 제야’를 읽었습니다.
작가의 이전 장편소설인 ‘기자들’과 단편집 ‘제망매’에서 엿보이듯이, 새 작품집에 실린 소설들 역시 ‘지식인 소설’의 범주에 적확히 들어맞습니다. 한 가지를 더 보태자면, 앞서 나온 ‘제망매’가 그 제목에서 강렬하게 드러냈듯이 그의 ‘많은’ 작품은 ‘누이소설’이라고도 칭할 수 있을 듯합니다.
무엇이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누이들’을 변주하도록 하는 것일까요. ‘엘리아의 제야’에 등장하는 다리가 불편한 손아래 누이, ‘누이 생각’의, 외국 남자와 세 번이나 결혼한 손위 누이 등. 그들의 삶이 곤고하다고만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주인공 남자가 그들에게 얹혀살다시피 합니다. 그러나 ‘누이’들은 각자 내적이거나 외적인 결여 혹은 불편, 크고 작은 좌절과 안타까움을 가시처럼 몸 속 깊이 박아두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그들만이 ‘누이’는 아닐 것입니다. ‘파두’의 고아원 동기인 미옥, ‘아빠와 크레파스’에서 주인공의 딸로 눈이 불편한 미원, ‘카렌’에서의 연인이자 초등학교 동기동창으로 편치 않은 성장기를 거친 화련 역시 넓은 의미에서의 ‘누이’들이겠죠.
문학평론가 김병익의 말처럼, 주인공과 누이들을 잇는 끈은 우애가 영글게 해놓은 ‘연대’일 수도 있고 연민일 수도 있겠습니다. 주인공의 우애와 연민은 ‘카렌’에서처럼 때로 협소한 의미에서의 사랑으로 맺어지지만, 실제의 혈육일지라도 함께 밤하늘을 보며 ‘…Le silence ´eternel de ces espaces infinis m'effraie… 이 끝없는 공간의 영원한 침묵이 나를 떨게 한다…’는 ‘팡세’의 한 구절 쯤 함께 읊으며 가슴 뛰는, 우애 이상의 연대감, 혹은 그 이상의 미묘한 감정을 형성하기도 하는군요.
‘여성은 곧 약자이자 연민의 대상’이라는 도식에 작가가 빠져있지 않으냐는 뻔한 경고를 내놓을 생각은 없습니다. 오히려 ‘누이’라는 말이 주는, 마치 그 기호의 태생에서 비롯되는 듯한 묘한 공감의 파장에 주목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지식인 소설’로서 이 책이 가진 면모에 대해 잊을 뻔했습니다. 지식인으로서의 자기성찰은 ‘피터 버갓 씨의 한국 일기’에서처럼 지식인 존재의 기만성에 대한 따끔한 경고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생성 문법’의 거장이요, 오늘날은 미국의 대외정책과 신자유주의에 대해 통박하고 있는 세계적 학자, 그의 내면에 감추어져 있는 내밀한 자기 배반의 실상을 통해 작가가 드러내고자 한 것, 그것이 ‘완벽한 정의란 없다’는 허무주의는 아닐 것으로 생각합니다.
파리 체재 시절의 벗에게 “그 사람들은 톨레랑스(관용)를 자기들의 전매특허처럼 내세우지만, 그곳의 인종주의 역시 만만하게 보이지 않았다”고 한마디 내지르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진실은, 한없이 섬세해지지 않으면 안 되는, 가장 섬세한 결까지 쓸어 어루만져 보아야 한다는 것, 그것이 작가가 들려주고자 한 말은 아니었을까요.
유윤종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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