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文 수석, 상황인식 이래서야

  • 입력 2003년 8월 10일 18시 35분


문재인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이 양길승 전 대통령제1부속실장의 향응 파문에 대한 언론 보도를 반박하기 위해 청와대 전 직원에게 보냈다는 e메일의 내용은 실망스럽다.

그는 양 전 실장에 대한 청와대의 1차 조사에 대해서 민정수석실이 “비리 예방기능을 적절히 수행했다”면서 “양 전 실장이 결과적으로 민정의 문제 제기 때문에 옷을 벗게 된 셈이어서 참으로 그에게 미안한 노릇”이라고 강변했다. 그는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선 “(술자리에서) 청탁을 받은 것도 아닌데 뭐가 그리 큰 문제인가…. 참석자 중 1명이 문제가 있는 인물이었다는 정도인데 개인적으로 양 실장에게 굉장히 미안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양 전 실장의 향응 파문과 이에 대한 청와대의 처리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는 얘기가 된다. 문 수석에게 묻고 싶다. 대통령과 아침저녁으로 얼굴을 맞대는 청와대 부속실장이 범죄, 그것도 온갖 파렴치한 범죄 혐의를 받고 있는 사람으로부터 과도한 향응을 받았고, 이에 대한 대통령민정수석실의 조사가 은폐와 축소로 얼룩져 있음이 드러나고 있는데도 이것이 과연 아무 것도 아닌 일인가.

대통령민정수석실은 실질적인 사정의 중추기관이다. 도덕성과 정직이 그 생명이다. 남의 잘못을 지적하기에 앞서 스스로 한 점 허물이 없어야 한다. 문 수석의 상황인식이 겨우 이 정도라면 문제는 심각하다. 문 수석이 이러니 청와대 안팎에서 양 전 실장에 대한 동정론이 나오고, 부대변인이라는 사람은 언론을 겨냥해 “우리 사회가 가학적 집단적 테러리즘에 빠진 것 같다”는 해괴한 말까지 해대는 것 아닌가.

거듭 말하지만 이번 사건을 키운 것은 청와대이지 언론이 아니다. 청와대가 처음부터 모든 것을 낱낱이 밝혔더라면 파문은 초기에 가라앉았을 것이다. 문 수석은 제 식구 감싸기와 섣부른 온정주의가 문제를 어떻게 악화시켰는지 깨달아야 한다. 잘못된 상황인식에 대한 반성이 그 첫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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