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 프리즘]최재천/癌이 커지기 전에

  • 입력 2003년 6월 3일 18시 2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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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구의 삼사칠(9-347)’ 할구이다. 어머니의 난자가 아버지의 정자를 받아들여 수정란이 된 후 벌써 아홉번째 분할을 맞고 있다. 하나의 세포인 수정란이 첫 분할을 거쳐 2개의 할구세포가 되고, 4개, 8개가 되더니 어언 300개가 넘었다. 이제 곧 아홉번째 분할이 끝나면 모두 512개의 할구들이 생겨날 것이다.

▼몸 세포들 본분 망각때 암 발병 ▼

나는 오늘 내가 평생 일하게 될 부서를 배정받았다. 내가 받아든 통지서에 따르면 나는 곧 간으로 보내질 것이란다. 환히 웃고 있는 친구의 통지서를 힐끔 훔쳐보니 그는 뇌로 가라는 명을 받았다. 또 한 친구의 통지서에는 ‘정소’라는 두 글자가 또렷하게 써 있었다. 갑자기 부아가 치밀기 시작했다. 내 운명만을 생각할 때는 몰랐는데 남의 행운과 비교하니 갑자기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는 뇌로 가서 평생 천하를 호령하며 살고, 또 누구는 차세대 생명체를 만드는 정자를 생산하는 보람 있는 일에 종사하게 되는데, 나는 왜 간에 틀어박혀 평생 술만 걸러야 한단 말인가?

힘없는 부모를 만난 탓이려니 했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우리 모두는 다 같은 부모로부터 온 형제들이 아니던가. 그걸 알고 나니 더더욱 억울하고 야속한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불교에서 수계(受戒) 의식을 행할 때 계율을 수여하는 계화상(戒和尙)인 삼사칠증(三師七證)으로부터 교수받은 예법인데 따를 수밖에. 오늘도 나는 묵묵히 술을 거르고 있다.

하나의 수정란으로부터 분할되어 나오는 초기 할구들은 아직 아무런 임무도 부여받지 않았다. 일란성 쌍둥이는 이런 할구들이 무슨 까닭인지 어느 순간 두 덩어리로 갈라진 다음 서로 다른 인간으로 자라는 것이다. 만일 그 순간에 할구들의 운명이 이미 정해져 있다면 ‘위는 한 쌍둥이의 몸에, 허파는 다른 쌍둥이의 몸에’하는 식으로 태어나야 할 것이다. 쌍둥이들이 모두 정상적인 인간들로 태어날 수 있는 까닭은 그때까지는 세포들의 운명이 아직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세포들은 각자 장차 어느 기관에서 어떤 일을 하게 될 것인지에 대한 명령을 받는다. 마치 논산훈련소에서 신병훈련을 마친 후 자대 배치통지서를 받는 것처럼. 피부나 혈액을 만드는 부서로 배치받은 세포들은 가자마자 바로 활발한 세포분열을 하게 된다. 정소나 난소로 가는 세포들은 사춘기를 맞아 호르몬이 돌 때까지 10여년 동안은 분열을 참아달라는 권고를 받는다. 간으로 가는 나는 살면서 별일이 없는 한 분열할 일도 없을 것이라는 얘길 들었다.

간에서 성실하게 맡은 바 임무를 다하던 어느 날 나는 내 삶의 의미를 되짚어보게 되었다. 남들은 모두 세포분열을 통해 자식들을 낳는 것 같은데 왜 나는 할 수 없단 말인가. 고민 끝에 나도 남들과 똑같은 양의 내 몫을 챙기기로 했다. 간 한구석에 앉아 열심히 분열을 시작했다. 내 삶에도 드디어 의미가 생긴 듯싶어 흐뭇해하던 어느 날 내가 간암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분명 행복해지고 있는데 내가 들어앉아 있는 이 몸은 나 때문에 곧 생을 마감할 것이란다.

▼타협없는 갈등, 국가도 병들어 ▼

요즘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온갖 일들을 보며 나는 “대한민국이 암에 걸렸다”는 진단을 내릴 수밖에 없다. 모두가 자기 이득만 챙기는 동안 국가는 병들어 죽고 있다. 암세포의 유전자를 생물학자들은 ‘무법자 유전자’라고 부른다. 분열하지 않겠다던 계율을 어긴 유전자이기 때문이다. 우리 몸을 이루고 있는 100조개의 세포들도 늘 갈등과 타협의 삶을 산다. 갈등이 빚은 불균형들이 끝내 타협을 얻어내지 못하면 모두 함께 침몰한다.

선진국들이라고 해서 암을 앓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은 암세포의 증식을 억제하는 방사선치료나 약물치료를 견뎌낼 수 있는 든든한 체력을 갖추고 있다. 예방이 가장 좋은 방법이긴 하지만 암은 이제 조기에 발견하기만 하면 대체로 치유가 가능한 질병이다. 대한민국은 아직 젊은 국가이니 설마 암 말기는 아니려니 기대해볼 따름이다.

최재천 서울대 교수·생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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